사회이재민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쏘았나‥10·26과 부마민주항쟁

입력 | 2022-10-26 09:00   수정 | 2022-10-26 10:57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거사와 살해 사이 ></strong>

10월 26일, 오늘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날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해가 1979년이니까 43년이 지났는데요. 김재규가 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총으로 쐈는지는 여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김재규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총을 겨누며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고 하고, 김계원 비서실장에게는 ″각하를 똑바로 모십시오″라고 했답니다. 차지철 경호실장에게는 ″이 버러지 같은 친구″라고 말했다는데요. 김재규는 자신이 ′민주화′를 열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차지철과의 권력 싸움에서 밀리자 범행을 저질렀다는 설이 있습니다. 사건 당일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김재규가 해마다 장준하 선생 유족에게 쌀가마를 전달했다는 증언이 있는데요. 민주화 운동을 하던 장준하 선생은 1975년에 경기 포천군 약사봉에서 의문사했습니다. 이후에 김재규가 박선호 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을 통해 유족을 도와줬다고 합니다. 추모하는 사람들은 독재에 반대한 군인, 나아가 의로운 사람으로까지 평가합니다. 반대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김재규는 유신 정권 핵심이었고, 결과적으로 반역자일 뿐이라는 의견인데요. 단순한 배신자로 보는 시각마저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1998년 국회의원 시절 MBC 인터뷰에서 ″패륜아의 얘기를 무슨 가치가 있다고. 자기가 살기 위해서 총질까지 하고 나서 대통령을 위하는 마음이 있겠어요.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갑자기 민주 투사가 돼 가지고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라며 김재규를 비판했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두고, 원인을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i>″차지철처럼 권력의 관성에 따라서 행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기에서도 김재규처럼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 거죠. 그건 너무 당연한 거라고 생각을 해요. 개인적인 권력 투쟁이 증폭됐다는 건 생각할 수 있죠. 그러나 모든 것들이 개인의 충동적인 결정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비과학적인 일이에요. 무슨 대단한 민주 투사가 되겠다는 생각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요. 꼭 그런 생각을 해야만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김재규를 대단한 의인으로 만들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충동적 행위라고 판단하는 것도 과학적인 판단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i>
<i>-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i>

10·26 사건이라는 결과만 놓고 생각하면 과거에 있었던 모든 상황이 총구로 향해 있는 듯합니다. 결과론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전부터 이어진 여러 줄기를 봐야 할 텐데요. 사건 직전 가장 큰 줄기는 부마 항쟁이었습니다. 거사로 보든 살해로 보든, 부마 항쟁은 10·26 사건이 일어난 결정적 이유입니다. 김재규가 부마 항쟁에 감화해 거사를 계획했을 수 있고요. 부마 항쟁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놓고 갈등이 커진 탓에 살해를 저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부마 항쟁 전까지 부산과 마산은 비교적 조용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는데요. 부산에서는 간혹 시위가 있어도 주동자가 잡혀가면 소리소문없이 끝났습니다. 부산대는 다른 지역 대학에서 ′유신 대학′이라는 조롱까지 받았는데요. 당시 학생들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섣불리 나서지는 못했습니다. 학생들이 모이기만 해도 마구 잡아가던 긴급 조치 9호 때문이었습니다. 정치적 억압과 함께 ′오일 쇼크′ 때문에 경제도 어려웠는데요. 신발이나 옷 공장이 많았던 부산 지역이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불만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는데요. 그해 여름, 부산 민심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김영삼과 YH 사건 ></strong>

서울 중랑구에 있던 가발 제조 업체, YH 무역에서 분노가 터져 나옵니다. 경영진이 적자 등을 이유로 강제 폐업합니다. 노동자들은 사주가 돈을 빼돌리고 위장 폐업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공 172명이 회사에서 농성했습니다. 회사에서는 물과 전기를 끊어버렸는데요. 노동자들은 마포구에 있는 신민당 당사로 옮겨서 계속 시위를 벌였습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노동자들을 지지하면서, 경찰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줬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강경 진압에 나서 노동자 1명이 숨졌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 총재를 YH 사건 배후로 지목합니다. 이어서 헌정 사상 최초로 국회에서 제명합니다. 부산 시민들은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YH 무역 노동자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많았고, 김영삼 총재는 부산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개강 직후 부산 대학가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i>″YH 사건이 일어나서 큰 충격을 받고, 연이어서 야당이 엄청난 탄압을 받았습니다. 일어나자마자 매일같이 학교 도서관에 가 가지고. 신문 보도를 통해서 접하면서 한 보름 만에 결심을 했습니다. ′시위를 해야 되겠다′. 시위의 목표가 단순히 무슨 유신 헌법 철폐, 노동 3권 보장 이런 구호가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 하야 이것을 이제 전면에 내세우고 나서야 되겠다.″</i>
<i>- 김맹규, 1979년 당시 부산공업전문대학 학생</i>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9월 못골민주항쟁, 10월 부마민주항쟁 ></strong>

1979년 9월 17일, 부산공업전문대학에서 대학생 신홍석 씨가 메가폰을 들고 게시판 위로 올라갔습니다. 곧바로 선언문을 읽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올해 안에 하야하라! 현 정권은 경제적 특권층의 반민족적 착취 행위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각종 노사 분규는 경찰관의 개입과 폭행 행위 기업가의 일방적 횡포로 묵살당하고 있다‥″. 교무실에서 ″야, 내려와!″ 하는 소리가 들렸고, 체육 담당 교수가 게시판 위로 올라가 신 씨를 밀쳐 떨어뜨렸습니다. 경찰이 시위 주동자 10명을 잡아갔습니다. 학생 5백여 명이 모였던 시위는 그렇게 끝났는데요. 곧바로 대학가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i>″세상에, 부산공전에서 시위를 했는데. 독재 타도, 대통령 하야 시위를 했는데. 자기들은 ′뭐 하고 있는 거냐′ 이 생각 했다고. 9월 17일에 했던 게 다른 대학생들에게는 빚이었고 부채였어요.″</i>
<i>- 김안재, 못골민주항쟁 참여자</i>

한 달 뒤쯤인 10월 15일, 부산대에서 기계설계과 3학년 이진걸 씨가 민주 선언문 약 9백 장을 뿌립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별로 모이지 않았습니다. 다음날인 10월 16일 경제학과 2학년 정광민 씨가 선언문 3백 장을 배포하고 다시 집회를 주도했습니다. 순식간에 5백 명이 집결했습니다. 운동장에 나가자 2천 명까지 불었습니다. 학생 시위대가 시가지로 진출하자 시민들이 응원했고, 저녁에는 직장인들과 상인들까지 합류하면서 5만 명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항쟁으로 커졌습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처음으로 모든 시민이 들고일어났습니다. 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간사였던 손학규 전 바른미래당 대표가 현장 상황을 조사하러 갔었는데요. ″김해 보안대에 끌려가 발가벗겨진 채로 이틀 동안 구타를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운동권에 종교계까지 엮을 수 있으니 최소한 사형이라고 생각했는데, 10·26 사건 때문에 목숨을 구했다고 여깁니다. 공식적인 경찰 연행자만 1천 563명. 길거리에서 맞고 고문당하고, 숨진 피해자는 얼마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부산에 가서 시위 현장을 봤습니다.

<i>″부마 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다‥그것은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 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습니다‥국민들의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은 일촉즉발의 한계점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i>
<i>-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항소 이유 보충서 中</i>
<스트레이트>가 단독 입수한 중앙정보부 보고서에도 김재규가 말한 실상이 나와 있습니다. 제목은 ′부산 마산 소요 사건의 실태와 대책′입니다. 부마 항쟁 일주일째인 10월 22일 청와대 안보대책회의에서 중앙정보부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요. 위에는 비밀문서를 뜻하는 한자 ′비′ 도장이 찍혀 있고, 아래에는 ′회의 종료 후 반납′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유출되면 유언비어가 퍼질 수 있다는 이유로 문서를 회수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조세에 대한 불만, 빈부 격차, 저임금, 정치 불신, 불황에 따른 취업난이 소요 사태로 이어졌다고 분석했습니다. 대안으로는 사회 저변층에 대한 획기적인 개선이 절실하다고 썼습니다. 부마 항쟁 간접 원인으로는 김영삼 의원 국회 제명과 YH 사건이 보도되지 않는 불만 등을 꼽았는데요. 종래 데모 양상과 달리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까지 합세했고 공장 직원과 점원, 재수생, 무직자 등 사회 저변층, 그리고 상인들과 일반 시민도 성원하고 있다고 명시했습니다.

보고서 안에는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 상인들이 시위대에 사이다와 김밥을 줬다는 내용까지 세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1977년 부가가치세 신설로, 물건값 10%를 세금으로 내야 했던 상인들 불만이 컸습니다. 시위 당시 상인들이 학생들에게 ″유신 철폐″를 ″부가세 철폐″로 바꿔서 외치라고 한 기록도 있습니다. 중정은 이번 사태로 드러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과감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고 적었는데요. 폭압적인 유신 헌법 체제를 좀 풀어주자는 뜻으로 보입니다.

정 반대 보고도 올라갔습니다. 전두환이 지휘한 보안사령부는 ″대통령 각하 영도력에 대한 지지와 존경 및 흠모는 변함이 없다″고 보고하면서, 초기 진압에 실패해 혼란이 커졌다고 했습니다. 중정과 경찰에 책임을 돌리는 듯한 내용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가 엇갈린 보고를 한 상황. 이미 10월 18일에 부산 계엄령, 20일에 마산 위수령을 선포한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i>″보고가 끝난 후에 박정희 대통령은 약간 유화적인 지시를 내려요. ′도대체 시민들의 불만이 뭐냐, 그걸 한번 조사해서 나한테 보고를 해라′. 그래서 중정, 계엄사, 보안사가 보고 자료를 일제히 만들어요. 사람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도대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 현재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지만 당장 눈에 들어오는 건 공수부대 동원하고 강경 진압하는 것이 제일 눈에 들어왔겠죠. 그렇게 해서 강경 진압 노선을 채택했을 거라고 봐요.″</i>
<i>- 이은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i>

전두환이 지휘한 보안사는 부마민주항쟁 이후에 ′부마 지역 학생 소요 사태 교훈′이라는 문서를 만듭니다. 여기서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 데모 대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 의지를 상실토록 위력을 보여야 함″이라고 명시했는데요. 부마민주항쟁에서 보안사가 얻은 ′교훈′은 이듬해 광주에서 현실화합니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신군부는 초기에 공수부대를 투입했고, 시민 166명이 숨졌습니다.

누구나 사실을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방향은 의도하는 대로 끌어가고 싶어합니다. 유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위에 배후 세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부마 항쟁 사흘째인 10월 18일, 지시를 내립니다. ″이번 부산 사건은 조직적인 배후가 있는 것 같다. 중앙정보부에서 조사하고 있다니, 철저히 조사하고 규명하라″. 부마 항쟁 당시 기록을 보면 10월 21일쯤 수사가 거의 끝납니다. 배후 세력은 없었습니다. 고문에 못 이겨서 일부러 조직도를 막 그려서 낸 사람도 있었는데요. 경찰은 ′이렇게 쉽게 불 리가 없는데′라며 조직도를 폐기했습니다. 아무리 조사해도 자발적 시위라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권력은 종이 위에 현실을 마음대로 그립니다. 대통령이 추측하자, 중앙정보부는 부마 항쟁 배후 세력을 만들어 냈습니다. 직선과 원으로 세상에 없던 조직도를 그렸습니다. 제목에 부산대, 동아대, 경남대, 신민당, 통일당이라고 나와 있는데요. 실제 학교나 정당 조직도가 아닙니다. 이름을 보면 거의 다 부마민주항쟁에 참여했던 인물들입니다. 누가 주도했고, 중간책은 누구이며, 행동책은 누군지 중앙정보부 마음대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나 1981년 부림 사건처럼 사건을 조작하는 전형적인 구조입니다.

중앙정보부는 간첩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워, 자발적 시위라는 실재를 감췄습니다. 조직도를 보면 부산대 밑에 양서 조합과 남민전이라는 두 축이 있습니다. 독서 모임과 공안 사건 조직을, 부마 항쟁 배후 세력으로 조작했습니다. 재야 민주화 운동 지도자인 최성묵 목사, 인권 변호사였던 김광일 전 의원 이름이 양서 조합 맨 위에 있습니다. 최성묵 목사는 북한 김일성 지령을 받은 간첩으로 몰렸습니다. 사회과학 전문 서점 ′태백산맥′을 운영했던 노승일 씨, 부산 YMCA 이사였던 김형기 씨 이름이 바로 아래에 적혔습니다. 다음에 실제로 부산대에서 시위를 주도한 ′공대 주동자′ 이진걸 씨와 ′상대 주동자′ 정광민 씨 이름이 나옵니다. 조직도에서 연결해 놓았어도 실제로는 모르는 사이인 경우가 많았는데요. 같은 대학이나 과에 속해 있거나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으면 일단 연결해 놓았습니다. 양서 조합 옆에 있는 남민전은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의 줄임말인데요. 1979년 10월 9일에 내무부가 발표한 공안 사건 조직 이름입니다. 국민의힘 이재오 상임고문과 더불어민주당 이학영 의원, 김남주 시인 등이 남민전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습니다.

야당 조직도는 눈엣가시였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연결시켰습니다. 신민당 부산 2지구당 위원장, 지방 비서, 김영삼 총재 외 8촌 동생까지 조직도에 올렸습니다. 부마 항쟁 직전 해인 1978년 12월에 총선이 있었는데요. 당시 의석 수는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더 많이 얻었습니다. 그러나 득표율로 보면 야당인 신민당이 32.8%, 민주공화당이 31.7%였습니다. 1.1%p 차이라 하더라도 유신 정권에는 상당한 위협이었습니다.
 
 
<i>″그건 초유의 사태였어요. 대도시에서는 야당이 승리했는데, 특히 부산은 1등이 전부 신민당이었습니다. 전국적으로도 그랬지만 특히 부산 지역에서는 민심 이반이 심각했다는 걸 알 수 있고요. 김영삼이라고 하는 정치인은 부산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잖아요. 손명순 여사가 마산 출신이고요. 김영삼에 대한 탄압은 곧바로 지역민들에게 굉장한 동조 현상을 일으켰어요. 반감이 날이 갈수록 커져 갔던 거죠.″</i>
<i>- 차성환, 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i>

당시 조직도에 올라 고문당했던 피해자들 말을 들어봤습니다. 부산대 시위 참여자인 이진걸 씨는 긴 막대에 사람을 끼워 놓는 ′통닭구이′와 물고문을 당했습니다. 경남대 시위대였던 최갑순 씨는 군인들에게 맞으면서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성 고문도 있었다고 말합니다. 고문을 이기지 못해 허위로 자백한 사람들도 있고, 자살 시도를 한 피해자들도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아니었는데도 잡혀가 인생이 망가진 피해자도 있습니다. 파출소 방화 누명을 쓴 옥상열 씨는 얼굴에 천을 덮고 물을 뿌리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감옥에 갔다 오니 취직이 안 돼 원양 어선을 타고, 조선소 하청 노동자로 일하다 어느새 환갑을 넘겼습니다. 학교에서 집에 가던 고등학교 2학년 서회인 양은 소형 최루탄인 사과탄에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됐습니다. 학교에서는 문제가 될까 싶었는지 서 양을 제적시켰다고 합니다.

<i>″내가 좋다 하는 대한민국 병원을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는데. 정신도 없지, 집 구석은 또 엉망이지. 학교에서는 선생도 와 보지도 안 하고. 전화도 없고. 학교하고 교육청에 가 보니까 명단에서 다 빼 버리고 없더란다. 학교에서 자꾸 골치 아프니까 그래 가지고. 그래가 내가 ′아이고 인간들. 지 새끼같으면 그리 하겠나, 어찌 그리 하노′‥″</i>
<i>- 김영자, 부마민주항쟁 피해자 故 서회인 어머니</i>

서회인 양은 최루탄 연기에 폐를 크게 다치고, 우울증까지 앓았습니다. 결국 지난 2000년 39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외에도 탱크가 택시를 깔아뭉개고 지나갔다거나, 특정 장소에서 맞아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봤다는 등 여러 증언이 있지만 아직도 확인하지 못한 피해자가 많습니다. 무고한 피해를 뒤로하고, 박정희 정권은 대규모 공안 사건을 발표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시 수많은 사람이 간첩으로 몰리고, 고문당하고, 사라졌을 수 있습니다. 43년 전 부마민주항쟁과 10·26사건이 없었다면 말입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자료 출처 ></strong>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김영삼민주센터

[스트레이트] ′간첩′ 누명 쓴 부마민주항쟁 43주년‥중앙정보부 ′조작보고서′ 단독입수<a href=https://imnews.imbc.com/replay/straight/6417490_28993.html ″ target=″_blank″><b>https://imnews.imbc.com/replay/straight/6417490_28993.html </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