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박재웅

'맑은 눈의 광인' 유영찬 "나는 25등 선수"

입력 | 2023-12-01 14:08   수정 | 2023-12-01 14:42
LG 유영찬은 팬들 사이에서 ′맑은 눈의 광인′으로 불립니다. 구단 유튜브에서 통통 튀는 엉뚱한 매력을 보여주며 얻은 별명입니다. 한국시리즈 직전에는 ′미친 놈처럼′이라는 자필 각오를 써내며 팬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에서 정말 ′미친 활약′을 선보였습니다. 이번 한국시리즈 3경기에 등판해 6이닝 1실점의 빼어난 투구로 LG의 역전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특히 패색이 짙던 2차전에서 2.1이닝 동안 퍼펙트 투구를 펼치며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똑똑히 알렸습니다.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외국인 투수 켈리 다음으로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한 유영찬. 염경엽 감독으로부터 ′투수 MVP′로 선정되며 프로 첫 시즌을 최고의 한해로 마무리한 스물여섯 ′늦깎이 신인′ 유영찬을 지난 28일 잠실에서 만나봤습니다.

Q. 요즘 오지환, 임찬규 등은 예능에도 출연하고 무척 바쁘다. 본인에게는 그런 요청이 없어서 서운하지는 않았나?

A. 인터뷰 요청이 없었으면 서운할 것 같았는데 그래도 기회가 찾아와서 기쁘다. 지환이 형, 찬규 형이 예능에 나오는 거 재밌게 봤다. (신)민재 형도 인터뷰 잘 하더라.

Q. 우승 이후 2주가 흘렀다. 여운이 남아있을 것 같은데.

A. 처음에는 내가 우승을 했나 싶을 정도로 별로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시리즈 영상을 계속 보다보니 심장이 그때마다 계속 뛰고 스스로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Q. 어떤 장면을 가장 많이 돌려봤나?

A. 3차전 지환이 형 역전 홈런 치는 거랑 2차전 (박)동원이 형이 역전 홈런 치는 거를 많이 봤다. 물론 내가 던지는 것도 많이 봤다. (웃음)

Q. 첫 등판 경기인 2차전 이야기를 해보자. LG로서는 더 이상 실점을 내주면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어떤 마음으로 마운드에 올라갔나.

A. 그냥 무조건 막을 수 있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경기 초반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팀이 역전승이 많았기 때문에 그냥 무조건 이겨야 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Q. 그리고 2.1이닝 퍼펙트 투구를 선보였다. 그렇게 많이, 잘 던질 줄 알았나?

A. 예상 못했다. 5회 2아웃에 등판했는데, 6회까지만 막을 줄 알았다. 그런데 던지다보니 너무 느낌도 좋고 구위도 좋다는 걸 스스로 느꼈다. 실제로 1.1이닝 던지고 나서 코치님이 ′하나 더 갈 수 있겠냐′ 물어봤다. 나는 너무 자신감이 많았기 때문에 ′저 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등판했다.

Q. 가을야구가 처음이라 떨릴 법도 했는데.

A. 던지기 전에는 그런 걱정이 있었는데 그날 컨디션을 내가 제일 잘 알지 않나. 던지다 보니까 (박)동원이 형이 던져달라는 곳으로 제대로 들어갔고, 내 자신감도 좀 많이 올라갔다.

Q. 최원태가 1아웃만 잡고 강판됐을 때 벤치 분위기는 어땠나.

A. 우리는 (최)원태 형이 잘 던지는 걸 알고 있다. 그날은 안 좋았으니까 그런 상황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원태 형이 내려오면서부터 ′오늘 모든 투수들이 다 던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Q. 이번 한국시리즈 ′염VP′(염경엽 감독이 뽑은 MVP)로 뽑혔는데 예상했나?

A. 초반에는 형들도 ′너가 받을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얘기했는데, 중반을 지나면 지날수록 동원이 형이 받을 줄 알았다. 너무 잘하지 않았나. 지환이 형도 잘했고. 그런데 나한테 주실 줄은 몰랐다.

Q. 한국시리즈 직전 자필 각오로 ′미친 X처럼′이라고 썼던 게 뒤늦게 화제가 됐다.

A. 단기전에는 몇 명 미친 선수가 나와야 좋은 성적이 난다는 얘기를 들었다.
Q. 올 시즌 본인에게 점수를 내린다면?

A. 한국시리즈는 100점. 정규 시즌은 50점. 정규 시즌 때는 말 그대로 기복이 심했다. 기복도 심하고 볼넷도 많이 주는 아쉬운 부분이 컸기 때문에 50점을 주고 싶다.

Q. 시즌을 돌이켜보면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인가.

A. 4월이 제일 힘들었다. 프로 첫 시즌이다 보니까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도 많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4월이 시간이 제일 안 갔던 것 같다. 초반 분위기에 적응하는 게 힘들더라. 팔이 힘들거나 정신이 없어서 힘들거나 이런 건 없었다. 물론 내 구위나 이런 부분에서 좀 나타나긴 했던 거 같긴 한데 스스로는 잘 몰랐다.

Q. 특별히 고마움을 드러내고 싶은 선배가 있나.

A. (김)현수 형은 내가 시즌 초중반에 볼넷을 많이 헌납했을 때 내 글러브의 기가 안 좋다고 해서 야구 잘하라고 비싼 글러브를 사주셨다. 찬규 형은 밥도 많이 사주셨다. 지환이 형은 주장으로서 할 일도 많았을 텐데 저를 많이 챙겨주셨다.

Q. 투수 조장 임찬규가 후배 선수들한테 조언을 많이 해준다던데.

A. 찬규 형은 진짜 나한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내 걱정을 찬규 형이 많이 완화해줬다. 예를 들어, ′많이 벗어나는 공을 던지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할 때, 찬규 형이 ′미리 걱정하지 말고 그냥 네가 던지는 것에만 집중하고 던져라′, ′아무 생각하지 말고 공 한 번 던질 때 공 한 번 생각하고 던져라.′ 이런 말을 많이 해줬다.

Q. 임찬규는 유명한 책벌레라고 하던데. 실제로 맞나.

A. 책 많이 읽는다. 책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멘탈적인 부분의 책이었다. 글씨를 써가며 읽더라. 그래서 나도 한번 읽어보려고 했는데 역시 나는 책을 많이 안 읽어본 티가 많이 나더라. (웃음)

Q. 염경엽 감독은 어떤 조언을 해주었나.

A. 9월쯤 내 공이 많이 얻어맞을 때가 있었다. 그때 감독님이 항상 ′신경 쓰지 말고 너의 공 던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진짜 신경 안 쓰고 계속 맞아도 그냥 계속 던지다 보니까 좋아지더라.

Q. 유영찬에게 염경엽 감독이란.

A. 나한테 영웅이시다. 나를 1년 풀 시즌으로 써주셨던 감독님이다.

Q. 지난 2년간 사회복무요원으로 일했는데 따로 훈련은 어떻게 했나.

A. 수원에 있는 장애인 종합복지관에서 2년간 일했다. 퇴근 후 웨이트를 좀 많이 했다. 친구가 코치를 하고 있는 데에서 야구 훈련도 많이 했다.

Q. 올 시즌 활약으로 깜짝 신인상 후보에도 올랐다.

A. 기분 좋다기보다는, 신인상 후보에 올라갔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Q. 직구 구속이 시속 150km가 넘던데, 내년에는 직구를 어떻게 써볼 생각인가.

A. 올 시즌 내 직구 최고 구속은 151km이었다. 볼 스피드 같은 경우에는 시즌 초반부터 신경 쓰긴 했다. 그런데 시즌을 하면 할수록 스피드보다는 컨트롤이나 커맨드가 더 중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내년엔 그런 부분을 좀 더 신경을 쓸 것이다.

Q. 향후 선발 욕심도 있나?

A. 시즌 중간에는 그런 생각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있었다. 시즌 끝나고 여러 생각을 해보니까 선발도 해보고 싶은데, 솔직히 팀이 필요로 하는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게 맞는 것 같다.
Q.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보자. 원래 투수가 아니었다고 들었다.

A. 중학교 때까지는 1루수를 하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구속이 조금 많이 늘었다. 그때부터 코치님들이 ′투수 한번 해보는 게 어떠냐?′ 제안하더라. 그래서 투수 운동을 하다 보니까 야수 운동을 못하게 됐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3학년 때는 부상이 왔고, 대학교 가서 팔꿈치 인대 수술을 하게 됐다. 대학교 1학년은 그냥 통으로 쉬고 2학년 때부터 제대로 투수 생활을 시작했다.

Q. 투수로서의 인생이 잘 풀리지는 않았는데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컸던 것 같다.

A. 확신은 없었다. 그냥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없었다.

Q. 그러다가 대학교 4학년 때인 2020년 LG에 지명됐는데.

A. 프로에 가는 게 꿈이긴 했지만, 꿈이라고 무조건 다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구속도 4학년 때 좀 올라오고 운이 좋았던 시기가 좀 있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있었다.

Q. LG 통합우승에 있어 본인의 기여도는?

A. 25등으로 하겠다. 물론 이닝과 경기를 많이 소화했지만, 중요한 상황에서 기여도는 조금 낮다고 생각한다.

Q. 너무 짠 거 아닌가. 내년 목표는?

A. 내년에 10등 안에 들어보도록 하겠다.
Q. LG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정규시즌 144경기, 한국 시리즈 5경기 동안 너무 많이 찾아와 주셔서 응원해 주셨다. 한국 시리즈 때는 너무 놀랐다. ′잠실 야구장이 이렇게 울릴 수도 있는 거구나!′ 생각도 들었다. 못하거나 잘할 때나 항상 잘한다고 응원해 주시고 못할 때도 ′다음에 잘할 수 있다′고 DM이 오는 게 힘이 됐다.
Q. 일찍 가정도 꾸렸고 아기도 태어났다.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내가 이 위치까지 올 수 있게 부모님이 항상 뒷바라지해 주셨는데 너무 감사하다. LG 팬이신 장모님, 장인어른도 응원을 항상 열심히 해주셨다. 우리 와이프도 아기 낳느라 고생 많았고, 태어난 지 한 40일 좀 넘었는데 건강하고 씩씩하게만 잘 자라줬으면 좋겠다.

Q. 아들한테도 한 마디.

A. 네가 태어난 해에 아빠 팀이 29년 만에 우승했는데, 아빠가 그 우승 멤버였고 나중에 이 영상을 봤을 때 그래도 자랑스러운 아빠로 봤으면 좋겠다.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