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5-28 10:53 수정 | 2020-05-28 11:02
′검언유착′ 의혹을 받고 있는 채널A가 50쪽이 넘는 진상조사보고서를 공개했습니다.
의혹을 명명백백히 확인하겠다며 자체 조사에 나선지 55일만에 내놓은 보고서입니다.
하지만 물음표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채널A가 자사 기자의 ′협박성 취재′만 인정했을 뿐 의혹의 핵심인 검사장의 실체는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검언유착′은 없었던 건지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은폐한 건지 발표된 보고서를 바탕으로 따져봤습니다.
#. ′잘 나가는′ 검찰 기자라더니…
수감된 신라젠 전 대주주 이철 씨 측에 수사가 확대되는 걸 막기 위해선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 여권 인사의 비리를 제보하라고 요구했던 채널 A의 이모 기자.
검찰 간부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함께 나눈 통화 녹취록을 보여줬습니다.
[채널A 기자 이모 씨 / 2월 25일]
″가족이 나중에 체포돼 가지고 가족이 이렇게(구속) 되는 것보다는 먼저 선제적으로 말씀하시는 게…″
검찰과의 두터운 신뢰관계를 자랑했던 이 기자는 소속사의 자체 조사에선 모든 건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였다고 말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녹취록은 ″100% 거짓″이었고, 법조 기자 생활을 6개월만 하면 누구나 ″5분이면 만드는 창작물″이었다는 겁니다.
같은 법조 담당기자로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대목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씌워진 의혹을 벗어보자고, 동료 기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말까지 스스럼없이 내뱉은 겁니다.
현직 검사장과의 대화라며 은밀하게 취재원에게 들려줬던 통화 음성도 실제론 다른 변호사의 목소리였다고 잡아뗐습니다.
′검찰과의 교감′은 모두 허구로 지어낸 이야기였다는 자신의 사기 행각을 자백한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은데요.
#. 세차례에 걸친 진술 번복
문제의 녹음 파일은 누구와 나눈 대화였을까요.
이 기자는 이 질문에 대해 세 차례나 입장을 번복합니다.
[녹음파일 관련 이 기자의 진술]
3/23 : A 검사장 통화녹음 이철 씩 측에 7초정도 들려줌
4/1, 4/3 : ″검사장 아닌 B변호사와 통화한 것″
4/6 4/22 : ″검사장과 통화한 것이 맞음″
5/16 : ″검사장이 아닌 제3자의 목소리″
취재원을 만나 녹음 파일을 들려준 다음 날.
이 기자는 자신의 직속상사인 배모 법조팀장과 홍모 사회부장에게 ′A 검사장의 통화싱크를 7초 정도 들려줬다′고 보고했습니다.
일주일 뒤 ′검언유착′ 의혹 보도가 나오자,
이 기자는 검사장이 아닌 ′다른 변호사와 통화한 것′이라고 보고 내용을 번복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어진 진상조사에선 두 차례나 다시 검사장 녹취가 맞다고 시인했고, 변호인을 선임한 뒤엔 한 번 더 말을 바꿔 검사장과 통화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자가 ′선택′한 입장은 ″취재원의 요구로 7초간 들려준 녹음은 검사장이 아닌 제3자의 목소리를 들려준 것″이라는 겁니다.
두 달동안 세 차례나 말을 바꾼 이 기자.
무엇을 고민했던 걸까요.
#. 후배와의 수상한 통화
보고서에 따르면 취재과정에서 이 기자는 A 검사장과 여러차례 통화를 나눴습니다.
문제는 이 전화 통화에서 이 기자가 검사장과 함께 취재 내용 및 수사 사항을 공유하고 논의했는지 입니다.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기자가 후배 백모 기자와 나눈 대화를 보면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 기자-백 기자 통화내용(3/10)]
이 기자 : ″OOO이 만나봐 봐. 내가 수사팀에 말해줄 수도 있고 그러는 거야″…″자기가 손을 써줄 수 있다는 식으로 엄청 얘기를 해″
(중략)
백 기자 : ″오히려 굉장히 적극적이네요″
이 기자 : ″어 굉장히 적극적이야.″
[이 기자-백 기자 통화내용(3/20)]
이 기자 : ″(취재원이) 자꾸 검찰하고 다리 놔달라고 한다고, 딜 칠라고 그랬더니 OOO이 ′그래 그러면 내가 (다리) 놔줄게′ 그러는 거야 갑자기″…″내가 녹음파일 들려주고 싶다고 하면 다 들려, 내가 다 녹음했어.″
백 기자 : ″네네″
백 기자는 대화에 거론된 OOO이 A 검사장을 지칭한다고 진술했습니다.
즉 검사장이 수사팀에 직접 협조를 요청하는 등 발벗고 취재를 돕겠다고 나섰다는 건데요.
물론 이 역시도 모두 이 기자가 지어낸 거짓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이 취재를 진행하던 후배에게까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었는지는 의혹이 남습니다.
#. ″검사장님 녹음 파일은 없어요″
파문이 확산된 이후의 대응 과정에서도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MBC가 취재에 나선 걸 알아챈 뒤 이 기자는 아침 일찍 배 팀장에게 ′반박 아이디어′라는 한글파일을 보냅니다.
파일 안에는 ′후배 기자를 시켜 문제의 녹음파일을 다시 녹음해 놓자′는 제안이 담겼습니다.
후배 기자가 통화 속 목소리를 흉내내 같은 내용을 다시 녹음해두면 실제 목소리와 음성 파장이 다르기 때문에 통화를 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가 생긴다는 설명입니다.
이른바 ′대리 녹음′ 전략인데 녹음 파일의 주인공이 A 검사장이 아니었다면 왜 이렇게까지 그를 숨기려고 했을까요.
채널A 보도본부 차원의 대응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김모 보도본부장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뒤 A 검사장에게도 ′알려주라′고 지시했고,
배 팀장은 A 검사장에게 보이스톡을 걸어 친절하게 ″녹음파일은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A 검사장은 ′검언유착′ 의혹 보도 직전 MBC 취재진에게 ″관련 수사를 담당하지 않고 있고, 사건과 관련해 언론에 수사 상황을 전달하거나 녹취록과 같은 대화를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통화 속 주인공이 A 검사장이 아니고, 사건 관련 대화도 한적 없다면 왜 굳이 A 검사장에게 녹음파일이 없다고 해명한 건지 묻고 싶습니다.
#. 이 기자는 왜 휴대전화·노트북을 지웠을까
진상조사가 시작되기 직전 이 기자는 지울 수 있는 모든 흔적을 지웠습니다.
휴대전화 두 대와 노트북 PC를 초기화했고 카카오톡 계정도 삭제해 보이스톡 기록마저 남지 않았습니다.
회사엔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했습니다.
이 기자는 ″어느 누구도 녹음파일을 들어보자고 한 사람이 없었다″며 ″MBC 보도 이후 내가 인격적 쓰레기가 됐고, 그래서 핸드폰을 다 지워버려야겠다고 해서 그런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사인 배 팀장과 홍 부장도 이 기자와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를 삭제했습니다.
데이터 복구 작업에도 대부분의 파일은 이미 날아간 뒤였고, 핵심 증거인 통화 녹음 파일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결국 채널A측은 ′검언유착′이 있었다고 단정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MBC의 취재가 시작돼 문제를 인식하고도 일주일가량 지체하면서, 결과적으로 시간을 벌어준 셈이 됐습니다.
스스로 진실 규명을 방해한 이 기자는 ′반쪽짜리′ 보고서 내용에도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 기자의 변호인은 ″이 기자는 본건 취재 과정을 사전·사후에 공모한 사실이 전혀 없고, 음성 녹음파일도 ′검찰 고위관계자′가 아니라는 입장″이라며 ″보다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습니다.
또 ″채널A의 보고서는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부실한 조사 및 한정된 증거를 토대로 성급히 내린 추상적 결론″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과연 해당 사건이 언론계 희대의 사기극으로 남을지 아니면 ′검언유착′이 사실로 드러날지 앞으로 남은 검찰 수사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