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07-18 12:32 수정 | 2022-07-18 15:06
<b style=″font-family:none;″>30년 전통 코스닥상장사, 불과 5년 만에 상장폐지된 이유는…</b>
1987년 설립된 한 섬유 회사가 있습니다. 섬유 제조 자동화 설비를 처음 도입하는 등 꾸준히 사업을 키웠습니다. 직원수를 200명 정도까지 늘렸고, 결국 코스닥 시장에 상장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이 튼실한 회사는 지난 2015년 이른바 ′기업사냥꾼′ 일당에게 인수됩니다. 회사명은 30년 만에 ′가희′에서 ′에스마크′로 바뀝니다. 그리고 불과 2년 뒤인 2017년, 이 회사의 당기순손실은 840억원을 기록했습니다. 2020년에는 끝내 상장폐지 됐습니다.
′기업사냥′이란 말 그대로 기업을 사냥감으로 삼아 잡아먹는 범죄를 일컫습니다. 자기 돈을 들이지 않고 사채 등을 이용해 기업을 인수합니다. 인수대금을 갚기 위해 회삿돈을 횡령하고 허위 정보로 주가를 띄워 차익도 챙깁니다. 대표적인 금융사기 수법입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16년부터 2019년까지 회삿돈 718억원을 빼돌린 혐의를 받습니다. 이 중 횡령한 돈은 89억원. 또 허위 언론보도 등을 통해 주가를 조작해 얻은 차익은 231억원이었다고 합니다. 서울 강남구 룸살롱에서 쓴 돈만 수억원이 되는 걸로 알려졌습니다.
에스마크를 인수한 기업사냥꾼 일당 4명, 최근 구속기소됐습니다. 이들을 구속하고 기소한 건, 지난 5월 부활한 서울남부지검 금융증권범죄합동수사단입니다.
<b style=″font-family:none;″>증권범죄합수단, 첫 구속기소 그리고 또 다른 소송?</b>
검찰이 이 사건을 처음 알게 된 건 지난 2019년입니다. ′사냥′을 당한 또 다른 코스닥 상장사를 수사하던 중, 자금 흐름을 추적하다 에스마크까지 등장하게 된 겁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고, 올해 1월 남부지검 금융조사1부에서 사건을 수사하다가, 합수단이 5월 출범하면서 사건이 합수단으로 넘어갔습니다. 수사 착수 기준으로는 합수단의 첫 사건은 아니지만, 합수단의 첫 구속 사건이 된 겁니다.
그리고 합수단은 첫 구속기소 뿐 아니라, 여태껏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일을 하나 더 시작했습니다. 바로 에스마크 기업사냥에 동원된 21개 법인을 모두 해산시켜달라고, 법원에 해산명령청구 소송을 낸 겁니다.
국가기관이 피해자를 대신해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걸 ′공익소송′ 제도라고 합니다.
검찰은 범죄를 수사해 형사 재판을 하는 게 익숙한 모습이지만, 이처럼 민사사송도 할 수 있습니다. 상법 176조 덕분입니다.
′회사의 설립 목적이 불법적인 것인 때, 회사의 이사 또는 사원이 법을 위반해 회사의 존속을 허용할 수 없는 때, 회사의 이해관계인이나 검사는 해산명령을 법원에 청구할 수 있다.′
이 조항을 근거로 검찰은 불법 도박사이트나 보이스피싱에 쓰인 페이퍼컴퍼니들에 대해 해산명령청구 소송을 해 왔습니다. 앞으로 다시 범죄에 더 악용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작년 서울북부지검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서울북부지검은 1년간 관할 법원에서 선고된 판결을 분석해, 아직 남은 페이퍼컴퍼니 68개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각 회사 주소지에 있는 전국 13개 법원에 해산명령을 청구한 적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례가 많지는 않습니다. 수사와 재판 등 가뜩이나 일을 쌓아놓고 있는 검사가 후속 조치까지 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상법 176조는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에 가깝다는 평가까지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금융합수단의 소송은 더 뜻깊어보입니다. 수법이 복잡한 금융 사기 사건에서 후속조치까지 나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금융사기 사건에서 해산명령을 청구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b style=″font-family:none;″> 검찰, ″21개 법인 해산시켜달라…또 범죄 악용될 우려″</b>
검찰이 해산시켜야 한다고 본 법인은 21개로, 이들 모두 서류상으로만 존재하고 실체는 없는 페이퍼컴퍼니이거나 범죄에 악용된 법인들입니다.
대표적으로 에스마크 인수를 위해 이 일당이 설립한 U사, 또 에스마크에서 빼낸 돈을 투자받은 것처럼 속여 기업사냥꾼들이 그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준 R사 등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에스마크와의 가장거래, 자금세탁 등을 통해 에스마크 주가를 부양하거나 자금을 유출하려고 만든 유령법인들도 있습니다.
검찰은 이 일당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가짜 법인들이 추가로 기업사냥에 활용되고 있다는 정황을 포착했고, 금융수사 분야에선 처음으로 상법 조항을 꺼내 든 겁니다.
이 법인들이 또 다른 기업사냥에 동원되면 더 많은 잠재적 주식 투자 피해자들이 생겨나는 거죠.
앞으로 검찰은, 이번을 계기로 금융사기 사건에서도 더 적극 회사 해산명령청구 소송을 제기할 걸로 보입니다. 이 사건처럼 기업사냥 사건은 많은 수의 페이퍼컴퍼니가 동원돼야 가능한데, 이 페이퍼컴퍼니를 만드는 게 무척 쉬워서, 사실 해산시켜야 할 법인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법상 최소자본금 액수가 낮아진 데다가 자기자본금, 즉 ′내 돈′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통장 잔고증명서만 있으면 법인을 세울 수 있는데, 온라인상에서 이런 잔고증명서를 만들어주겠다는 전문 업체들, 즉 브로커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장 ′잔고증명′ 단어만 검색해도 ′법인 설립 잔고증명′이라는 제목의 업체 홍보 글들이 보입니다.
실제로 에스마크를 인수하는 데 쓰인 U사나 자금 유출 도관업체인 R사 역시 페이퍼컴퍼니인데, 이 기업사냥 일당은 인터넷상 브로커를 통해 U사를 설립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브로커들은 법인을 설립하려는 기업사냥꾼들에게 돈을 줘 잔고증명서를 발급하게끔 도와주고, 증명서가 발급되면 곧바로 빌려준 돈에 이자를 붙여 이득을 챙깁니다.
금융 수사를 했던 검찰 출신 변호사는 ″사실상 잔고 증명 하나만 하면 될 정도로 법인 설립이 쉬워 회사들이 난립하고 기업사냥에 동원되고 있다″며 ″자본시장 교란의 시발점과 같은 일명 ‘잔고 증명 서비스’를 해주는 브로커들이 자본시장에서 활개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b style=″font-family:none;″>범죄 악용 ′페이퍼컴퍼니′, 해산명령 청구 더 활발해져야</b>
페이퍼컴퍼니는 전형적인 기업사냥 사건 말고도 신종 금융범죄로 분류되는 이른바 테라·루나 사건에도 등장합니다.
2019년 싱가포르 테라 본사에서,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가 유일한 이사로 등재돼있는 플렉시코퍼레이션이라는 법인으로 100억원 넘게 넘어갔는데, 가상화폐를 현금화하는 통로 역할을 한 것으로 의심됩니다.
생각해보면 여태까지 검찰이 한 번도 자본시장 범죄에 연루된 회사의 해산명령청구를 하지 않은 게 의아할 정도입니다.
금융범죄를 전담하는 남부지검에는 앞으로 이런 해산명령청구 소송을 전담할 공익소송팀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히지만, 아직 이 팀에 검사는 1명뿐입니다.
이왕 검찰이 시작한 금융사기 사건 해산명령청구, 이참에 더 적극 나설 필요가 있습니다. 자본시장 범죄는 무엇보다 서민이 피해자인 만큼, 복잡한 금융사기 사건이기 전에 민생 범죄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