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05-03 09:27 수정 | 2022-05-03 09:34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직전 사면권 행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정치권의 갑론을박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겠지요. 하지만 대통령의 ‘임기 말 사면’은 적절한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이 문제는 세계 최초로 헌법에 대통령의 사면권을 명시한 미국에서도 4년 또는 8년마다 되풀이되는 논란거리입니다.
<b style=″font-family:none;″><美 대통령 사면권..브레이크 없는 헌법적 권한></b>
미국 대통령의 사면권은 연방헌법 제2조 제2항에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합중국에 대한 범죄에 관하여 탄핵의 경우를 제외하고, 형의 집행 유예 및 사면을 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연구원의 자료 ‘사면권의 한계에 대한 헌법적 검토’(2019. 9. 6)를 보면, 미국은 연방헌법 외에 별도로 사면의 종류나 절차를 명시한 연방법률은 없습니다. 그만큼 사면권에 제한이 없는 거죠. 탄핵 그리고 연방법이 아닌 주(state) 법률을 위반한 범죄, 이 두 가지에 대해서만 대통령의 사면권이 제한된다고 합니다. 주 범죄에 대한 사면권은 주지사가 행사합니다.
이렇게 막강한 미국 대통령의 사면권은 특히 임기 말에 문제가 되곤 했습니다. 퇴임하고 나면 선거를 통한 심판 같은 견제 방법마저 없어지니까 사면권 남용 우려가 꾸준히 제기돼 왔던 거죠. 그럼 실제론 어떠했을까요. 가장 최근에 퇴임한 트럼프 전 대통령과 그 전임자인 오바마 전 대통령의 경우를 볼까요. 이들은 사뭇 다른 양상으로 사면권을 썼습니다.
<b style=″font-family:none;″><트럼프, 임기 말에 측근과 사돈 사면></b>
트럼프 전 대통령(2017. 1~2021. 1)은 퇴임 직전 두 달 동안, 다시 말해 자신의 대선 패배가 확실해진 2020년 11월 말부터 퇴임 시까지 4차례나 사면을 단행했습니다. 이 기간에 많은 측근들이 사면을 받았습니다. 주요 인사로는 트럼프 행정부의 초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마이클 플린이 있습니다. 트럼프는 2020년 11월 25일 사면 당일 트위터를 통해 “플린의 완전한 사면을 발표해 영광이다. 그와 가족에게 축하를 보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플린 외에 트럼프 대선 캠프의 인사들인 조지 파파도풀로스 전 고문, 폴 매너포트 전 선대본부장, 이른바 비선 참모인 로저 스톤도 사면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러시아 스캔들에 대한 특검의 수사 과정에서 허위 증언 등의 혐의로 기소됐었습니다. 러시아 스캔들은 2016년 미국 대선에 러시아 정부가 트럼프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개입했다는 의혹인데요. 특검이 약 2년 간 수사했지만 공모 사실을 규명하지 못했습니다. 이밖에 주목 받은 인사가 또 있는데요.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전 백악관 선임보좌관의 부친 찰스 쿠슈너, 즉 사돈도 임기 말 사면에 포함됐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임기 말 측근 무더기 사면에 대해서는 당시에 미국 공화당 내에서도 “뼛속까지 썩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퇴임 직전 마지막으로 73명을 사면하면서,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와 후원자인 사업가 엘리엇 브로이디를 포함시켰습니다.
<b style=″font-family:none;″><오바마, 마약사범 사면하며 사법 개혁 촉구></b>
오바마 전 대통령(2009. 1~2017. 1)은 퇴임 직전 한 달 동안 3차례 사면을 단행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사면권을 최소한으로 행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임기 막바지에 대거 사면을 했습니다. 2016년 12월 19일에 수감자 78명의 형을 면제하고, 153명을 감형했는데요. 당시에 ‘미국의 소리’ 방송(VOA)은 이 사면이 하루 최다 규모라고 전했습니다. 오바마는 이듬해인 2017년 1월 두 차례 사면에서도 대규모 형 면제와 감형을 단행해서, 재임 8년 동안 1천 명이 훌쩍 넘는 재소자의 형기를 줄여줬습니다. 역대 최고 기록입니다. 이때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 리크스’에 기밀 자료를 건넨 첼시 매닝 전 미군 일병이 35년형에서 7년형으로 감형을 받았고, 미 연방교도소 최장기수였던 푸에르토리코 민족해방전선의 리더 오스카 로페즈 리베라(당시 74세)가 사면을 받았습니다.
오바마는 재임 중 마약사범들의 형기 단축에 초점을 두고 사면을 했는데요. 마지막 사면이었던 2017년 1월 19일, 재소자 330명에 대한 감형도 대부분 마약사범이었습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왜 마약사범 감형에 초점을 뒀을까요? 마약사범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형량을 부과하기 때문에 미국 교도소에 재소자가 넘쳐 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바마는 사면 조치는 마지막 방법이라면서, 의회가 사법개혁에 나서라고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오바마의 사면에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는데요. 당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오바마 대통령의 감형 조치로 수감자들이 예정보다 빨리 석방돼 미국인들의 안전이 위협 받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임기 말 사면 논란’에 휩싸였던 대통령은 많습니다. 일례로 빌 클린턴 전 대통령(1993. 1~2001. 1)은 백악관을 떠나면서 마약 혐의로 복역하던 동생 로저 클린턴 주니어를 사면했습니다. 현직 대통령의 임기 말 사면은 아니지만,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사임 한 달 만에 후임인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사면을 받은 일은 유명합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미국에서 대통령의 사면권 남용을 막기 위한 논의는 꾸준히 이뤄지고 있는데요. 헌법재판연구원의 연구 자료 ‘사면권의 한계에 대한 헌법적 검토’는 탄핵·선거·도덕적 비난이 통제 장치가 될 수 있고, 사면권 남용이 임기 말에 발생할 경우 별다른 통제 수단이 없기 때문에 헌법 수정 제안이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