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이재훈
′핀란드화′(Finlandization)
약소국이 강대국의 눈치를 보면서 소극적 외교정책을 펴는 것을 뜻하는 용어인데요.
이는 과거 냉전 시기에 핀란드가 인접국 소련(현 러시아)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취했던 외교 정책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핀란드로서는 다소 굴욕적인 용어이죠.
당시 핀란드 정부는 소련의 반체제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쓴 <수용소 군도>의 핀란드어 번역본 출간을 막았습니다.
또 소련이 지지하는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야당 후보를 사퇴시킬 정도였으니 그런 용어가 나올 법도 합니다.
핀란드는 소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최근까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하지 않고 ′중립국′으로 남아왔는데요.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지난 5월 핀란드는 스웨덴과 손잡고 나란히 나토 가입을 전격 선언했습니다.
현재 나토 30개 회원국 가운데 28개 나라가 이들 나라의 나토 가입을 비준해, 핀란드는 나토 가입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핀란드의 ′탈중립′ 행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사가 현지시간 4일 진행됐습니다.
핀란드 남부도시 콧카에는 옛 소비에트연방(소련)의 국부인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의 흉상이 있었는데요.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긴 레닌의 모습을 묘사한 이 흉상은 소련의 일부였다가 현재는 에스토니아의 수도가 된 탈린시(市)가 1979년 선물한 것입니다.
이후 수십 년간 콧카 시내 광장에 세워져 있었던 이 흉상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습니다.
한번은 흉상의 팔 부분에 누군가 붉은 페인트를 칠해 핀란드 정부가 소련 측에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현지에선 소련에 억압당하던 핀란드의 역사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이를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콧카 시내의 레닌 흉상이 철거되자 일부 주민은 축하의 의미로 샴페인을 터뜨렸습니다.
올해 77살이라는 마티 레이코넨은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체제 중 하나를 창시한 이의 흉상을 이곳 거리에서 없애는 건 위대한 일″이라면서 ″일부는 역사적 기념물로 흉상을 보전해야 한다고 보지만 대다수는 없애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앞서 핀란드 여타 지역에서도 소련 시절 세워진 인물상들이 차례로 철거됐는데요.
4월에는 서부 도시 투르크 중심가에 있던 레닌 흉상이 철거됐고, 8월에는 1990년 모스크바 시당국이 헬싱키에 기증한 ′세계 평화′란 제목의 청동 조각도 철거되는 신세가 됐다고 AFP통신은 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