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3-01-06 12:11 수정 | 2023-01-06 12:19
미국 하원에 두 가지 이색 풍경이 등장했습니다. 하나는 ′팝콘을 든 의원′이고 하나는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는 ′왕따 의원′입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먼저 ′팝콘′입니다.</strong>
미국 법률이 정한 의전 서열 3위, 하원의장을 뽑는 선거가 3일째 진행 중입니다.
한 번에 끝날 일인데 ′진행 중′이라고 표현하는 건 어느 후보도 당선을 위해 필요한 과반, 218표 이상을 확보하지 못해서입니다.
작년 11월 중간선거 결과, 하원 435석 중 공화당이 222석, 민주당이 213석을 확보하면서 공화당이 과반을 차지했습니다.
당연히 다수당이 앞세운 후보가 의장이 되는 게 정치적 상식이고 그 동안의 의회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그런데 공화당 안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공화당은 케빈 매카시(57세, 캘리포니아, 9선) 원내대표, 민주당은 하킴 제프리스(52세, 뉴욕, 6선) 신임 원내대표를 대표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1차 투표 결과 매카시 203표, 제프리스 212표, 기타 후보 19표였습니다.
민주당은 이탈표 하나 없이 오롯이 제프리스에게 표를 몰아줬지만 (당선자 사망으로 1명 결원) 공화당에서 19표가 이탈하면서 매카시가 2등으로 추락했고 아무도 과반을 얻지 못했습니다.
1차 투표에서 하원의장을 선출하지 못한 건 의회 역사상 딱 백년 만입니다. 1923년, 9차 투표까지 가서 의장을 선출한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투표 3일째인 오늘, 11차 투표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 10차 이상으로 진행된 건 남북전쟁 직전 갈등이 극심했던 1859년 이후 164년 만입니다.
공화당 이탈표는 ′프리덤 코커스(Freedom Caucas)′라는 공화당 내 강경 우파 모임이 주도했습니다. ′프리덤 코커스′는 트럼프 대통령을 추종하는 트럼피가 다수를 이룹니다.
이들이 몽니를 부린 건 한 마디로 ″매카시가 우리만큼 강경하지 않다″는 이유입니다. ″그 동안의 행보를 지켜봤는데 매카시가 바이든 정부를 상대로 결기가 부족하다″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면 우리가 요구하는 여러 강력한 장치와 반정부 법안을 약속하라″는 협박성 단체 행동인 겁니다.
1차 투표가 끝나고 곧바로 의장 선출을 위한 2차 투표가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프리덤 코커스는 2차 투표 때 짐 조던이라는 새로운 후보를 추천합니다. 그는 프리덤 코커스의 초대 좌장입니다.
2차 투표 결과는 다시 매카시 203표. 그러자 예상치 못한 장면이 나옵니다.
짐 조던이 직접 ″그러지 말고 공화당이 큰 일을 하려면 매카시를 뽑아야 한다″면서 자신에게 표를 던진 의원을 설득하고 나선 겁니다.
그는 ″우리는 함께 뭉쳐 핵심 사안을 위해 싸우는 게 좋습니다. 그것이 국민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케빈 매카시가 우리를 이끌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We had better come together and fight for these key things. That is what the people want us to do. And I think Kevin McCarthy is the right guy to lead us″)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란표를 던진 의원들이 조던 의원의 이 설득 연설을 높게 사면서 ″조던이 이렇게 겸손한 사람이다. 이것만 봐도 리더가 될 자질이 충분하다″면서 오히려 치켜세웠습니다.
플로리다 출신 맷 개츠 의원은 ″그는 방금 우리가 들은 것보다 더 많은 비전을 가진 연설을 했습니다. 짐 조던을 지명합니다. 짐 조던은 겸손합니다. (″(He) just gave a speech with more vision then we have ever heard from the alternative. I′m nominating Jim Jordan. Jim Jordan is humble″)″라고 말했습니다.
그 덕인지 3차 투표에서는 매카시 반란표가 한표 늘었습니다.
민주- 공화 양당은 4차 투표를 강행하지 않고 다음날 다시 하자고 정회를 합의했습니다.
그 날 밤, 매카시는 반란표를 잠재우기 위해 ′프리덤 코커스′를 상대로 설득하고 협상하기 위해 잠을 이룰 수 없는 아주 긴 밤을 보냈을 겁니다.
그렇게 하원의장이 된다하더라도 매카시는 이미 미국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당선자 중 한 명으로 기록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설득과 협상이 실패했나 봅니다. 이틀째 투표에서도 매카시는 표를 더 얻지 못했습니다. 4차, 5차, 6차 투표 결과는 마찬가지였고 세 번째 날로 이어졌습니다. 셋째 날에는 ′도널드 트럼프′를 하원 의장으로 지명하자는 의원이 등장할 정도로 공화당 내분은 점입가경으로 흘렀습니다. 참고로 미국 헌법은 꼭 의원이 아니어도 하원 의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돼 있어서 트럼프를 지목하는 게 가능합니다.
이 과정에서 바로 ′팝콘′이 등장한 겁니다. 민주당 의원들이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듯 공화당의 자중지란을 지켜보겠다면서 조롱하듯 본회의장에 팝콘을 들고 온 겁니다.
하원 의장 투표를 지켜보면서 몇 가지를 느낍니다.
하원 서기가 의원 한명 한명을 호명하면 의원이 ″나는 누구를 지지한다″고 답하는 게 하원 의장 투표 방식인데 이 때 자당 원내 대표가 아닌 다른 후보를 당당하게 말한다는 게 ′당론′에 익숙한 한국 유권자에겐 어쩌면 신선할지 모릅니다.
또 하나, 트럼프 키즈들의 반란이 증명하지만 트럼프는 여전히 미국 정치판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살아있는 권력′이란 게 다시 증명됐습니다.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팝콘을 들고오는 걸 ′정치적 해학′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공화당의 자중지란이 결코 민주당에 유리해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정확히는 바이든 정부에 더 그렇습니다. 매카시가 의장이 된다하더라도 재임 기간 내내 트럼피한테 휘둘릴 수 밖어 보이고 그렇다면 의회 승인을 얻어야 하는 바이든 정부의 주요 정책은 ′무조건 반대′에 발목잡힐 수 밖에 없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 두번째 이색 풍경, ′왕따 의원′은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strong>
당사자는 올해 34살인 조지 샌토스 공화당 의원입니다.
그는 선거 과정에서 브라질 이민자 2세 출신으로 성소수자에다 뉴욕시립대와 뉴욕대 MBA를 졸업하고 골드만삭스와 시티그룹 같은 월가 투자은행에서 일한 ′아메리칸 드림의 화신′으로 자신을 포장했습니다.
′찐한′ 인생 스토리 덕에 샌토스는 민주당 텃밭에서 판세를 뒤집고 당선됐습니다. 그런데 당선증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뉴욕타임스가 그의 대학 졸업장과 월가 이력이 모두 가짜라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여성과 결혼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공개적인 동성애자′가 아닐 수 있다는 의심도 받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의회에 입성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멍하게 앉아 있거나 휴대전화만 뒤적거릴 뿐이었습니다. 한국식 표현으로 치면 ′의회 왕따′를 자초한 겁니다.
보스턴글로브지가 ″도널드 트럼프 이후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한 공화당원″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가 선거 과정에서 그려낸 삶 자체가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샌토스가 의원직 사퇴를 거부하고 당당하게 의회에 나왔지만 기다리는 건 냉대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