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김윤미

의대·해외로 줄줄이 떠나는 '핵심인재' 과학계 위기감은 0(제로)?

입력 | 2024-10-30 08:15   수정 | 2024-10-30 08:17
인재들이 이공계를 떠나고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한국′의 이공계를 기피하고 있습니다.

미국 국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EB-1, EB-2 비자를 발급받은 한국인은 5,684명. 인도(2만 905명), 중국(1만 3,378명), 브라질(1만 1,751명)에 이어 네 번째로 많았습니다.

이 숫자를 인구 10만 명당으로 환산하면 한국은 압도적인데요, 10.98명 약 11명으로, 인도(1.44명)와 중국(0.94명)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걸 왜 ′인재 유출′로 해석해야 할까요? EB-1, EB-2 비자는 미국 정부가 ′고급인재′만 내주는 비자이기 때문입니다. 대학교수나 국제대회 수상자, 최소 석사학위 이상을 소지한 연구원이나 전문가에게만 발급되니, 고급 인력들이 한국을 떠났다는 뜻이 됩니다.

특히 이공계 분야 인재들이 많은 걸로 추정되는데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우선 교육 현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div class=″ab_sub_heading″ style=″position:relative;margin-top:17px;padding-top:15px;padding-bottom:14px;border-top:1px solid #444446;border-bottom:1px solid #ebebeb;color:#3e3e40;font-size:20px;line-height:1.5;″><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 </div><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 </div><div class=″ab_sub_headingline″ style=″font-weight:bold;″>의대 열풍 속 과기원 수시 인기, 뜯어보니</div><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div></div>

경제 부흥기이던 1980~1990년대 초, 자연계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학생들은 서울대 물리학과를 갔습니다. 입시 성적으로 상위 10위 학과를 추려보면 2~3위에 서울대 의예과가 있었고 나머지는 컴퓨터공학, 전자공학 같은 이공계 학과들로 채워졌습니다. 이공계로 진학하면 취업이 잘되고 생활도 안정적일 거라 기대됐기 때문입니다.
분위기가 바뀐 건 ′평생직장의 신화′가 깨진 IMF 이후입니다. 2000년대 들어 의치열계 인기가 치솟더니 최근 최상위 학과 목록에선 일반 이공계 학과는 아예 자취를 감췄습니다. 의대 쏠림 현상의 시작입니다. 의대 선호는 견고하게 이어져 이공계 기피, 이공계 위기라는 말도 익숙해졌습니다.

그런데 올해 2025학년도 대학 수시전형 결과는 의외였습니다. 의대 증원과 학령인구 감소에도 과학기술원 지원자가 작년보다 많이 늘어난 겁니다.

올해 카이스트 수시에는 6,500명이 몰려, 지난해보다 지원자가 8.6%가 늘었습니다. 디지스트 17.4%, 유니스트 13.3%, 지스트 14.4% 등 다른 과기원도 10% 이상 늘었습니다. 고무된 과기원들은 보도자료를 내며 ″입학 설명회를 열심히 했다″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 혁신의 결과″라 자평하기도 했습니다.

이공계가 살아난 걸까요? 통계를 분석해 보니 착시 현상에 가까웠습니다.

과기원은 교육부가 아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담당 대학이어서 수험생이 6번까지만 쓸 수 있는 ′수시 제한′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과기원 수시에 합격해도 일반대 정시 모집에 다시 지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입시 전문가들은 최상위권 학생들이 6회 수시 카드를 모두 의대에 쓰고 과기원에는 복수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을 걸로 추정했습니다.

실제로 최근 3년간 과기원의 신입생 충원율을 봤더니 작년과 재작년, 일부 과기원은 입학 정원 100%를 다 못 채웠습니다.
과기원에 입학해 놓고 중간에 그만두는 학생도 많습니다. 최근 4년간(2020~2023년) 4대 과기원의 중도 탈락자는 1,119명입니다. 의대 증원이 있는 올해는 그 수가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학기술원은 이공계 최고 인재 교육을 목표로 하는 과학기술 특성화 대학입니다. 등록금은 국비로 지원되고 곳에 따라 기숙사비와 생활비를 더해 주기도 합니다. 교과 과정도 연구·탐구 중심으로 개설해 핵심 두뇌 육성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한 과기원의 입학처장은 MBC와의 통화에서 ″과기원 합격증이 일종의 보험이 됐다″고 털어놨습니다. 과기원은 등록금 부담이 거의 없는 데다 과학고를 조기 졸업한 학생들도 많아 반수를 선택하는 일이 잦다는 설명입니다.

그는 ″올해도 2학기 휴학생이 많았다″면서 ″남아 있는 학생도, 재수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학생들도 학교에 정 붙이도록 마음 잡게 하는 게 일″이라 걱정했습니다.

<div class=″ab_sub_heading″ style=″position:relative;margin-top:17px;padding-top:15px;padding-bottom:14px;border-top:1px solid #444446;border-bottom:1px solid #ebebeb;color:#3e3e40;font-size:20px;line-height:1.5;″><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 </div><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 </div><div class=″ab_sub_headingline″ style=″font-weight:bold;″>전국 의대 신입생 출신고교 첫 전수조사</div><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div></div>

이번엔 고등학교로 가보겠습니다. 역시 과학중점 교육기관으로, 최상위 자연계 학생들이 모이는 전국 28개 과학고와 영재학교.

정부는 과고와 영재학교에서 의대로 지원하면 국가 장학금을 반납하게 하고 추천서를 안 써주는 식으로 이공계 진학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략이 잘 통하고 있을까요?

최근 3년간 전국 39개 모든 의과대학의 신입생 출신 고등학교를 분석했습니다. 학적부에 기록된 최종 출신 학교를 기준으로 고3 현역부터 이른바 ′N수생′까지 모두 살폈는데요. 분석 결과 전국 의대 입학인원 3천 1백여 명 중 과학고와 영재학교 출신은 약 7%로 집계됐습니다. 2022학년도에는 228명, 2023년엔 215명, 올해는 206명이 의대로 갔습니다.
국립대와 사립대로 나눠보면 각각 4%, 8%로 집계됐습니다. 한 자릿수라 별로 안 높은 것 같지만 ′탑 7′로 꼽히는 사립대 의대를 살펴보니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2024학년도 성균관대 의대 입학생은 42명. 이 중 과학 특목고 출신은 14명으로, 3명 중 1명꼴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과학 특목고 비중이 높은 연세대 의대는 22%, 그나마 2022학년도 29%보다 낮아졌지만, 여전히 5명 중 1명 수준입니다.

그 뒤로는 경희대(20.72%), 중앙대(17.44%), 가톨릭대(15.79%), 한양대(11.82%), 고려대(11.50%) 순이었습니다. 상위 7개 사립대 의대의 평균을 냈더니 19.8%가 과학고·영재학교 출신이었습니다.
특목고에선 내신을 잘 받기 어렵고, 교과 과정도 일반고와 달라 수능에 적합하지 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립대 의대 진학률이 높은 이유는 뭘까요?

입시 전문가들은 수시전형에 주목했습니다. 일부 의대가 정성평가를 중시하고 수능 최저기준을 없애거나 완화해 최상위권 특목고 학생들을 유치하고 있다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학습 능력이 뛰어난 특목고 학생들이 반수나 재수로 국어 한 과목만 준비하면 의대 진학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고도 하는데요.

의대 정원이 늘어 의대끼리 우수한 학생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과학고·영재학교 출신은 좋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대학들은 자체적으로 ′학생을 뽑았을 때 안 나가느냐, 중복 합격이 덜하냐′ 등의 통계적 기준으로 고교 서열화를 진행하고 있다″며 ″그런 점에서 과학고와 영재학교 출신은 딱 의대들이 선호하는 인재″라고 설명했습니다. 내신 점수가 조금 떨어지고 수능 준비가 안 됐지만 누가 봐도 공부 잘하는 학생, 즉 과학고·영재학교 출신을 뽑아 놓으면 중복합격 우려도 줄고 우수한 인재를 선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의대 증원으로 특목고 출신 ′N수생′들이 더 유리해질 거란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div class=″ab_sub_heading″ style=″position:relative;margin-top:17px;padding-top:15px;padding-bottom:14px;border-top:1px solid #444446;border-bottom:1px solid #ebebeb;color:#3e3e40;font-size:20px;line-height:1.5;″><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 </div><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 </div><div class=″ab_sub_headingline″ style=″font-weight:bold;″>제자 두고 교수도 수도권행, 학생은 ″공부하고 싶어요″</div><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div></div>

그런데 취재 과정에 뜻밖의 제보가 접수됐습니다.

의대 열풍에도 과기원을 선택한 학생들이 공부하고 싶어도 어려운 상황이란 겁니다. 이유는 ′교수가 없어서′였습니다.

MBC가 만난 대구경북 과기원·디지스트의 한 박사과정생, 졸업을 1년 앞둔 시점에 지도 교수가 서울로 떠났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공계에선 교수가 학교를 옮기면 연구과제와 연구예산, 그 예산으로 구매한 실험 장비까지 세트로 옮겨집니다.

이 학생은 1) 지도 교수를 따라 서울로 가 논문을 마무리하거나 2) 대구에서 새로 지도교수를 찾아야 하는 두 가지 선택지 중 2번을 택했습니다. 서울의 비싼 월세가 부담인 데다, 학부와 달리 대학원은 편입·학적 이동이 불가능 해 경계인처럼 생활해야 하는 것도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는 ″과기원의 학습 분위기와 실험 설비가 좋아서 학교를 선택했었는데 갑자기 지도교수가 사라져 버리니 계약 사기를 당한 느낌″이라고 말했습니다.
디지스트 학부 3학년 금정우 씨의 지도교수도 떠났습니다.

이 학교에는 학부생들이 스스로 연구 주제를 정하고 대학원 실험장비로 탐구해 보는 ′UGRP′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금 씨도 실험을 한창 진행하고 있었는데 최근 교수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서울로 이직했습니다. 실험 기자재들도 옮겨졌고 지금은 대학원생에게서 연구지도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3년 간 디지스트를 떠난 교수는 14명, 전체 139명의 약 10%입니다. 14명 중 13명은 에너지공학과나 전기전자컴퓨터공학과였는데, 모두 서울 소재 대학으로 떠났습니다. 배터리나 AI 연구자 수요가 늘다 보니 스카우트가 많았던 걸로 보입니다.

울산 과기원에서도 올해 교수 11명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교수들의 이직 배경에는 자녀의 교육 문제가 가장 큰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왕이면 수도권에서 교육시킬 수 있는 직장으로 옮긴 겁니다. 디지스트는 이들을 붙잡기 위해 ′특훈 교수′ 제도를 운영하고 1억 원의 별도의 특별 연구비도 지원하지만 역부족입니다. 학생들은 의대로, 교수는 수도권으로 향하면서 미래 인재를 육성하는 중점대학마저 존립을 걱정하는 상황입니다.


<div class=″ab_sub_heading″ style=″position:relative;margin-top:17px;padding-top:15px;padding-bottom:14px;border-top:1px solid #444446;border-bottom:1px solid #ebebeb;color:#3e3e40;font-size:20px;line-height:1.5;″><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 </div><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 </div><div class=″ab_sub_headingline″ style=″font-weight:bold;″>이공계의 진짜 위기는 ′무관심′</div><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div></div>

MBC가 살펴본 이공계 위기는 결국 ′일자리 문제′로 수렴됐습니다. 학부 4년, 석박사 4~5년간 공부하고 박사 후 연구원을 마쳐도 국내에선 만족할 만한 직장을 구할 수 없으니 진작에 의대로 빠지거나 해외로 간다는 겁니다. 그나마 국내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학생들은,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떠나는 교수들로 학습권을 침해받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 과기계가 충분히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올해 국정감사에서도 의대 증원, 과기원 충원율 미달 등이 주요 의제로 다뤄졌지만 한 과기원 총장은 ″올해 수시 모집 경쟁률은 나쁘지 않았고 이탈률도 크게 늘진 않았다, 생각보다 의대 증원 영향이 없다″라고 웃으며 답해 핀잔을 받았습니다. 질의하던 국회의원이 ″너무 둔감한 거 아니냐″라고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연구개발 예산이 한순간 삭감되고 과학 영재를 꿈꾸다가도 경제적 보상을 찾아 의대로 진학하는 게 현실입니다. 이공계의 진짜 위기는 현장의 신호를 제대로 포학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되짚어 볼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