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6-02-05 15:28 수정 | 2026-02-05 15:28
<i> ″상속세 부담 때문에 한국 부자들이 해외로 떠나고 있다.″</i>
최근에 언론에 보도된 기사 제목입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상속세 납부 방식 개편을 주장하며 내놓은 보도자료를 인용한 기사입니다. 비슷한 기사가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대한상의가 이 주장의 근거로 삼은 통계가 검증되지 않은 엉터리 데이터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MBC 취재결과, 대한상의는 ″통계를 충분히 검증하지 못했다″며 오류를 인정하고 인용 자제까지 요청했습니다.
지난 3일, 대한상의는 ′상속세수 전망 분석 및 납부방식 다양화 효과 연구′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습니다. 상속세 최고세율 인하와 납부 방식 개선이 시급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대한상의는 그 근거로 영국의 투자이민 컨설팅 업체 ′헨리 앤 파트너스(Henley & Partners)′의 보고서를 인용했습니다. ″한국의 고액자산가 순유출 규모가 세계 4위 수준″이라며, 과도한 상속세가 국부 유출의 주범이라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다수의 언론들도 이를 그대로 받아서, ′상속세를 더이상 참지 못한 부자들이 한국을 떠난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문제는 이 통계가 이미 신뢰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됐다는 점입니다.
영국의 조세 정책 분석 기관인 TPA(Tax Policy Associates)는 지난해 7월, ″헨리 앤 파트너스의 통계는 이민 컨설팅 상품을 팔기 위한 마케팅 자료에 가깝다″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b style=″font-family:none;″>■ ″자연 발생 확률 0.03%‥인위적으로 설계한 수치″</b>
특히 TPA가 내놓은 통계 감식 결과는 충격적입니다. TPA는 해당 보고서의 숫자들이 실측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입력(typed)되거나 조작(engineered)된 정황이 뚜렷하다고 분석했습니다.
우선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수치들이 발견됐습니다. TPA에 따르면 보고서상 백만장자와 초고액자산가의 비율이 전 세계 도시에서 수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안정성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확률은 0.03%에 불과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백만장자 비율이 이렇게까지 안 변하는 통계를 신뢰하기 힘들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통계 수치 끝자리가 0이나 5로 떨어지는 경우가 비정상적으로 많았습니다. TPA는 ″이런 패턴이 우연히 나타날 확률은 24만 분의 1″이라며 ″이는 측정된 숫자가 아니라 누군가 임의로 타이핑해 넣은 흔적″이라고 꼬집었습니다.
논리적 모순도 지적됐습니다. 보고서 작성 업체는 분석 기준에서 부동산 자산을 제외했다고 인정했음에도, 백만장자의 수는 이전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산의 핵심인 부동산이 빠졌는데 숫자가 그대로인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 전 세계 15만 명의 자산가들이 보유한 주식, 암호화폐, 부채까지 1인 기업이 완벽하게 추적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며, TPA는 ″이는 국세청조차 불가능한 일″이라고 일축했습니다.
<b style=″font-family:none;″>■ 대한상의 ″주요 언론 보도했길래 썼다‥인용 자제해달라″</b>
대한상의가 이런 엉터리 통계를 거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MBC 취재 결과, 대한상의는 국회에 ″통계 인용 과정에서 충분한 검증을 거치지 못했다″고 밝혀왔습니다.
대한상의 측은 ″지난해 국내외 주요 언론에서 다수 보도된 바 있어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며 안일하게 데이터를 차용했음을 시인했습니다. 통계의 문제점을 지적한 영국 TPA의 분석 자료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어 ″인용한 통계의 산출 방식과 방법론에 대한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하다는 지적과 학술적·공식 통계로 활용하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존재함을 인지했다″면서 ″즉시 주요언론사에 통계 인용을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습니다.
결국 대한상의는 뒤늦게 수습에 나섰고, 홈페이지에 게재된 보도자료에서 해당 통계 부분을 전면 삭제해 다시 게시했습니다.
<b style=″font-family:none;″>■ 입맛 맞는 통계 ′체리피킹′?</b>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가 예견된 참사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재계가 ′상속세 인하′라는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자극적인 사설 업체의 데이터를 무분별하게 끌어다 쓴 결과라는 것입니다.
대한상의는 ″이번 일을 계기로 좀 더 엄격한 기준에서 신뢰 있는 자료 산출을 위해 힘쓰겠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상속세 때문에 부자들이 탈출한다′는 자극적인 프레임 앞에 최소한의 검증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