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앵커: 추성춘,백지연

광주특위 청문회 박준병씨 시민과 20사단 3번 충돌 증언 등[김석진]

입력 | 1988-12-21   수정 | 1988-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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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특위 청문회 박준병씨 시민과 20사단 3번 충돌 증언 등]

● 앵커: 오늘 첫 번째 증인으로 나온 박준병 80년 당시 20 사단장은 20사단 병력을 광주에 투입하는 데는 미국의 승인이 필요하지 않으며 광주 주둔 중에 시위 군중과 세 차례 충돌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오늘 청문회 내용을 김석진기자가 정리해서 전해드리겠습니다.

● 기자: 박준병 당시 20사단장은 오늘 증언에서 20사단은 미국의 작전 통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의 승인 없이 광주에 투입됐으며 병력 이동에 따른 통상적인 협조체제로서 미국 측에 이를 통보할 수는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박준병 증인은 21일 밤 아홉시 쯤 전투교육 사령부로부터 자위권 발동 명령을 받았다고 밝히고 광주 주둔 기간 중에 광주 시민과 총격을 벌인 것은 27일 최종 진압작전을 포함해서 3차례였다고 말했습니다.

● 옥만호(공화당): 광주 시민간의 최초 출동 일자 및 장소 그리고 그 경위 및 인명피해에 대해서 보고를 받은 일이 있으시죠.

● 박준병(당시 20사단장): 크게 보면 목포 광주 간 도로에서 밤에, 광주 군병원 앞에서 낮에, 그리고 27일 새벽에 그리고 직접 많은 군중에게 포위돼 있었지만 전연 충돌상태는 없었던 5월 22일 오후 송경리 이런 상황입니다.

● 기자: 박준병 증인은 5월 27일 도청 진압 작전에는 20사단 3개 연대가 모두 투입됐으나 도청 진입 부대는 광주 출신의 조치규 중대장이 지휘한 61연대 1대대 1중대로서 민간인 4명과 군인 1명이 사망했을 뿐 이 과정에서 치열한 교전이 없었던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 심명보(민정당): 5월 27일 미명, 마지막 평정작전에 증인의 부대가 참가를 했는데, 그 당시 CAC사령관이 증인의 부대에 하달한 작전 명령은 어떤 내용입니까.

● 박준병(당시 20 사단장): 어제 말씀드렸듯이 편의 공작제가 먼저 들어간다.

사격할 때는 가급적 하퇴부 를 쏴라.

양민 피해를 최소화 하라.

이런 내용이 말하자면 26일 10시에 지시된 그런 CAC 사령관의 작전 지침이었습니다.

● 기자: 박준병 증인은 광주 문제는 광주 시민이 최대 피해자인 동시에 국민과 군도 피해자라고 강조하고 공권력을 가진 측에서 이를 사과해야 하며 민화위의 결론에 따른 해결방법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박찬종 의원: 5공 비리와 광주 문제가 뉴런벌거나 동경식으로 해결되길 바라진 않습니다.

증인은 사학도 였다고 저는 들었습니다.

우리가 역사적 관점에서 보아가지고 이것이 화해와 일치의 방향에서 여의도 식으로 해결돼야 하는데, 이 해결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 박준병(당시 20사단장):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공권력을 가진 쪽, 여기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진실을 밝히도록 노력하고.

그리고 그 분들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그런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광주 시민 쪽에서도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말하자면 화해와 용서의 마음으로 이것을 받아들이시도록 저는 이렇게 부탁드리면서 이번에는 이 문제가 역사적으로 종결됨으로써 국가 발전에 큰 전환을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조홍규(평민당)의원: 사죄한 사람, 미안한 사람, 잘못됐다는 사람, 별 사람이 다 있는데, 자기 책임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증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불가사의한 문제입니다.

● 박준병(당시 20사단장): 어떤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규명하기는 참 어렵게 됐습니다, 이게.

벌써 시간적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또 누가 어떻게 잘했느냐 못했느냐를 따지기가 어렵지 않겠느냐.

그래서 저는 민화위의 결론이 상당히 타당하다는 주장입니다.

● 기자: 박준병 증인은 또 전국 비상계엄 확대를 논의한 5월 17일 전군 지휘관 회의에서 당시 안정훈 군수기지 사령관이 시나리오대로만 하지 말고 토의 하자는 내용의 발언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오늘 두 번째 증인으로 나온 정 웅 당시 31사단장은 죽음을 무릎 쓰고 시위를 진압하라는 정 웅 사단장의 지시가 있었다고 말한 7공수 33대 대장 권승만 씨의 어제 증언을 부인했습니다.

정 웅 씨는 오히려 군 병력을 출동시키라는 전투교육 사령관의 지시를 받고 경찰력으로 대처하자는 건의를 했으며 무기를 시위대에 빼앗긴 책임 때문에 80년 6월 4일 예편됐다고 말했습니다.

정 웅 씨는 이어 80년 5월 20일과 21일, 두 차례에 걸쳐 이상훈 당시 육군본부 작전 참모부 차장으로부터 무장헬기를 동원해서라도 시위를 강경 진압하라는 전화 지시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정 웅 씨는 또 11대 총선에 입후보했던 지난 81년 3월, 노태우 당시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내려와 후보 사퇴를 권유하기 위해 부하를 시켜 두 차례 만나자고 요청해 왔으나 이를 거절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정 웅 씨는 5월 19일 무혈진압지시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5월 20일 오후부터 유혈 사태가 벌어져 전투교육 사령부에 찾아가 보니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비롯한 공수 여단장들이 그 곳에 모여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정 웅 씨는 이어 20일 오후 자신의 부하지휘관들이 상급부대인 전교사에 있었으며 자신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자신의 지휘권은 사실 상 박탈당한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MBC뉴스 김석진입니다.

(김석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