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앵커: 차인태

경북 경주 항룡사 절터 본래자리 여부 논란[이상룡]

입력 | 1989-08-31   수정 | 1989-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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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항룡사 절터 본래자리 여부 논란]

● 앵커: 경상북도 경주에 있는 황룡사 절터는 문화재 당국이 현재 8년이 넘게 심혈을 기울인 대규모 발굴사업장입니다마는 이 절터가 본디 황룡사 자리가 아닐 것이라는 주장이 일부 관계자들 사이에 제기되고 있습니다.

문화과학부의 이상룡 기자가 의문점을 중심으로 조사해 보았습니다.

● 기자: 지금 제가 서 있는 이곳은 반월성 성곽입니다.

이 반월성 동북쪽에는 지금 발굴이 완료된 황룡사 터가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를 비롯한 모든 고문헌에는 월성동쪽에 황룡사 터가 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우선 이러한 의문을 갖고 현재의 황룡사가 옛날 신라시대의 황룡사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황룡사는 진흥왕 14년, 즉 서기 553년에 짓기 시작해서 17년 만에 1차로 완성된 뒤 2차로 장육존상을, 3차로 금당을 그리고 다시 아홉 나라의 오랑캐를 무찌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9층목탑을 세우는 등 근 100년 동안에 적어도 4번에 걸쳐서 대역사를 진행한 신라 최대의 국찰입니다.

지난 83년 말 발굴이 끝나 건물터의 주춧돌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현재의 황룡사는 그 넓이가 2만 5천여 평입니다.

이 황룡사의 바로 북측에는 3만여 평 넓이의 분황사가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황룡사를 서라벌 제1가람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황룡사는 옛날의 분황사보다도 5천평 정도 작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또한 구전으로는 황룡사가 불국사의 3배라고 했습니다마는 현재의 황룡사 건물터 규모는 770여 칸, 옛 불국사 사찰규모는 2천여 칸으로서 옛 불국사에 비해서 반도 훨씬 못 미치는 작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신라의 국보3보 중의 하나인 장육존상이 세워져 있던 좌대입니다.

이 좌대는 폭이 2미터 20센티미터 가량 되는 자연석으로 돼 있습니다.

삼국유사 기록에는 장육존상의 무게가 3만 5007근, 즉 요즘 무게로 환산하면 21톤가량 되는데 2미터 20센티미터 폭의 좌대에 이처럼 엄청나게 무거운 불상이 세워질 수 있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안성재 씨 (섬종사 불상전문가): 두께가 2센티 정도라면 높이는 약 한 10미터 좌대 넓이는 3.5미터 정도 될 것 같습니다.

2미터 20이라면 10미터 높이의 불상이 서기는 너무 좌대가 빈약하기 때문에 너무 불안정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 기자: 종금당 바로 앞에 있는 역시 신라3보 중의 하나인 황룡사 목탑지에는 한 가운데 심초석이 있고 그 위에 연좌석이 놓여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연좌석은 석가모니가 앉아서 설법했다고 전해져 당시에 매우 신성스럽게 여겨졌던 돌인데 이것은 네 군데나 구멍이 뚫려 있고 더군다나 몽고병란의 대화재로 인한 불의 자국이나 장구한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지 않습니다.

목탑과 종금당과의 거리도 너무 좁습니다.

비록 금당지 바로 20여 미터 앞에 높이 80미터의 목탑지가 건립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기록에 볼 수 있듯이 서라벌 사람들이 탑 주위에서 다함께 모여 팔관회 등 대규모 축제나 행사를 벌이기에는 너무 협소한 감을 줍니다.

신라 최대의 사찰이었던 황룡사는 고려 고종 1238년 몽고병란에서 완전히 폐허로 소실됐습니다.

이 몽고군의 황룡사 대방화가 있었던 그해부터 조선조 말까지 경주에 재임했던 부사나 부윤이 기록했던 부윤선생안이라는 관공서의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황룡사 9층 목탑 좌우에 금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어 현재의 목탑 후면에 세 개의 금당이 나란히 배열된 구조와는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 권오찬 씨 (향토사학가): 모든 옛날 기록에 보면 삼국유사를 비롯한 모든 불교 관계 기록에 의하면 황룡사의 위치는 분명히 월성의 동쪽이라고 기록하여 있어요.

그러나 현재 황룡사의 주위치로써 발굴하고자 하는 곳은 오히려 북이라는 표현을 써야만 온당할 정도의 위치입니다.

● 기자: 이들 고문헌에는 또 월성 동쪽에 황룡사, 황룡사 북쪽에 용궁, 용궁 북쪽에 분황사가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황룡사가 제 위치라고 하면 황룡사의 북쪽 담장과 분황사 남쪽 담장 사이가 50여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왕이 자주 들렀던 용궁이 들어설 공간이 없게 됩니다.

● 고평석 스님 (고대사연구가): 박물관 바로 위쪽에 반월성이 있습니다.

반월성에서부터 난산 동편으로 이 일대가 전부 다 황룡사지일 것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 기자: 고평석 스님이 황룡사라고 추정하고 있는 월성 동쪽지역은 현재는 논으로 변해져 있지만 심초석으로 보이는 거대한 돌이 논 한가운데에 있고 목탑지 주춧돌 그리고 탑도 눈에 띄고 있습니다.

황룡사유적조사팀이 현재의 발굴터를 황룡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곳 목탑지에서 경문왕 때의 중수내용을 기록한 사리장치가 나왔고 황문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됐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평석 스님은 이곳이 황룡사의 정위치라면 마지막 여섯 번째로 개축했던 고려 숙종 때의 사리장치가 나와야 되며 또 명문기와의 출토량과 지역도 황룡사라는 증거로는 희박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취재 결과 현재의 황룡사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이루어진 황룡사 발굴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문헌에서 기록된 것처럼 월성 동쪽에 대한 재조사가 시급히 이뤄져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MBC뉴스 이상룡입니다.

(이상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