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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하겠지만 키 얘기부터 해야겠다. 159cm의 미국 청년 타일러는 대화 내내 흥분하고, 강조하고, ‘까르르’ 웃었다. 그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양 손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점심을 거른 그가 머핀을 뜯으며 말했다.
“한국에 유학 간다니까 친구들이 ‘한국 가면 키 작은 사람이 많을 테니 너는 편하게 옷을 사 입을 수 있겠다’고 했다. 막상 와보니 한국 남자 평균 키가 나보다 훨씬 크더라. 나도 모르게 ‘아시아 사람들은 키가 작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지 않았는지, 반성했다.
한 번은 지하철을 탔는데 한국인 할아버지가 나한테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었다. 미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바로 ‘빵’ 터졌다. ‘프랑스 사람이 아니고? 미국 사람이면 키가 더 커야 하는 것 아니야?’라고 하더라. 그 분도 나도, 친구들도 선입견에 빠져있었던 거다.“
타일러 라쉬(Tyler Rasch)는 :
유학생이자 방송인. 1988년 미국 버몬트 주 출생. 시카고대학 국제학부 졸업.
2008년부터 한국어 공부 시작.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대학원 재학 중.
한국어로 비유를 들어 사회과학 개념을 설명할 정도로 한국어 능력이 뛰어나다. 그가 준비하는 석사 논문 주제는 “고등교육이 한국과 말레이시아와 같은 중견국가의 국제 네트워크 권력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타일러는 한국 유학 생활을 양잠설(누에가 뽕잎을 먹고, 자고, 탈피하는 과정을 글쓰기에 빗댄 윤오영의 수필)에 비유하기도 했다.
좋아하는 사자성어는 ‘화이부동’(和而不同 : 남과 사이좋게 지내되 자기의 중심과 원칙을 잃지 않음)이라고 했다.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이냐”고 물었다. 타일러가 <논어(論語)>라고 고쳐줬다.
Q. 아, 당신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냐.
A. 간단하게 말하자면 타일러는 학생이다. 일단. 학생이고, 가끔 방송에 나오는 학생이다.
Q. 인간적으로 한국어를 너무 잘한다.
A. 잘 하지 않는다. 한국어 공부하면서 지금도 많은 고생을 한다. 내 한국어 실력에 만족하지 못한다. 명사 앞에 형용사를 갖다 붙이려면 ‘~한 무엇’ 이렇게 쓰는데, 그런 활용법을 잘못 쓰게 될 때 굉장히 화가 난다! (이 대목에서 그는 진짜 흥분했다) 한국어를 배운지 7년이나 됐는데! 한국 생활은 4년이나 되는데! 왜 한국어가 안 되는 거지? (그래도 그 정도면 정말 똑똑하다는 말 많이 들었겠다.) 칭찬받는 건 누구나 다 좋아하지 않나. 하지만 부담이 많이 된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처럼 난 똑똑하지 않으니까.
그는 “아시아 언어를 배우면 유럽 중심 세계관이 바뀔 것”이라는 친구 조언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북한 현실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더 욕심이 생겼고, 그게 한국 유학으로 이어졌다. 타일러가 잘하는 건 한국어뿐만이 아니다. 그가 방송이나 강연에서 실력을 선보인 외국어는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이탈리어, 포르투갈어 등 8개 국어다.
Q. 한국어 공부는 어떻게 했나.
A. 외국어는, 실수를 많이 하면서 배운다. 알다시피 한국어의 경우 한자어가 많다. 이 한자와 저 한자를 갖다 붙이면 합성어가 되는데, 그냥 붙인다고 말이 다 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나는 계속 물어본다. 틀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 자(字)하고 이 자(字)를 합치면 이런 뜻 되지 않나요?”라고 묻는다. 그러면 상대방이 맞는지 틀리는지 가르쳐준다. 그런 식으로 배우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실수를 하려고 해야 한다. 두려움을 버리고, 계속 실수하고, 또 그 실수를 복기하면, 제대로 배우게 되는 것 같다.
Q. 사람들은 많이들 실수를 두려워한다.
A. 그 두려움, 버려야 된다. 외국어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필요한 사고 같다. “틀려도 되니까 그냥 해봐라”가 필요한 것 같다. 그래야 회의할 때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틀릴까봐 말을 안 내뱉으면,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영감(靈感)이 될 수 없다. 서로 주고받음이, 공유가 안 이뤄지는 거다. 새로운 정보를 찾고, 주고받고 배울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없어지는 거다.
Q. ‘영어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람도 많다.
A. 미국인인 나도 영어할 때, 아직 못하는 부분이 더 많다. 모르는 단어도 많고 문법도 틀린다. 한국 사람도 한국어 단어 모를 때도 있고 문법 헷갈릴 때가 있지 않은가.
“나는 왜 영어를 배우고 있느냐”의 질문을 우선,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지금 그렇게 강조하는 것만큼, 영어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국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시험용 영어, ‘스펙 쌓기’용 영어 때문에 그렇게 미친 듯이 영어공부를 다 해야 하는 상황이 돼버린 거 같다. 사실 한국의 직장에서 영어를 많이 쓰고, 영어로 업무를 전담하고, 외국인들을 마구 접대하는 상황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건 아니지 않나.
또 지금은 중국 사람을 대할 때 중국어로 얘기하고 베트남 사람을 대할 때 베트남어로 얘기해서 훨씬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시대 아닌가. 그들의 말을 배워놓는 게 한국인의 입장에서 훨씬 더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지 않을까.
타일러는 그러면서 콩글리시 얘기를 꺼냈다. 누군가 당신 영어를 콩글리시라고 놀리거나 지적한다면? 그는 “콩글리시도 일종의 잉글리시”라고 했다.
Q. 그건 왜일까.
A. 당신이 미국 가서 영어를 한다 치자. 당신 발음 완벽한가? (아니다 당연히) 그래, 완벽할 필요도 없다. 그냥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의 발음이면 된다. ‘한국어스러운’ 발음이 섞여있다고 해서, 나쁜 게 절대 아니다. 실제로 미국에는, 굉장히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자기 모국어의 특징을 아직 보유하고 있다. 영어는 사실 그런 교류를 통해 계속 변화하고 또 만들어진다.
한국에서 와있는 영어권 외국인들도 콩글리시를 많이 쓴다. 엄청 많이 쓴다. 영어에 없는 한국어 표현을 많이 가져다 쓴다. 그냥 우리가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좀 변덕스럽다”, “자꾸 자기 의견을 바꾼다”,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다”는 말을 할 경우, 이렇게 얘기한다. “He‘s so 왔다갔다 all the time, you know?(있잖아, 걔 너무 왔다 갔다 하더라, 항상.)” 상대방이 아예 못 알아들으면 문제지만, 뜻이 통한다면 콩글리시는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가서 영어를 하더라도 콩글리시를 굳이 없애려고 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의 얘기는 퍽 논쟁적이었다. 혹시나 한국의 교육 현실을 낭만적으로 여기는 거 아닐까.
Q. 한국의 교육 문제는 좀 다르다. 영어 시험 준비도 그렇고.
A. 말 잘하셨다. 한국의 시험용 영어는 영어가 아니더라. 수능 시험에 나오는 영어는, 정말 말도 안 된다. 정말, “말이 안 된다.”
수능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것 중에 하나가 유의어 문제다. 지문 전체를 주고, “각 문장의 괄호 안에 있는 특정한 접속사나 부사, 명사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의어는?” 이라는 식이다. 그런데 정답대로 유의어를 넣고 읽어보면 어감이 확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그 유의어를 넣지 말았어야 하는 문장인 것이다. (타일러는 finally, consequently, eventually, after all 등의 예를 들었다. 우리말로는 다 ‘마침내’ ‘결국’으로 번역되지만, 실제 영어에서는 어감이 얼마든지 달라진다는 것이다.)
굳이 유의어를 찾아서 쓰면, 문맥상 부자연스런 경우가 많다. 유의어의 어감이 너무 동떨어지기 때문에 해당 영어 지문이 말하는 바가 도대체 뭔지 모르게 된다. 콩글리시보다 그런 식의 영어가 오히려 안 통한다. 영어를 포함한 모든 언어는 문법과 단어 이전에, 자연스러운 짜임새라는 것이 있다. 그걸 간과하고 수학 공식으로 보고 만든 것 같은 문제들이 많다. 영어를 언어가 아니라 수학으로 접근하는 것 아닐까?
그는 말을 많이 했지만 생각도 많은 듯 했다. 교육 얘기가 나오자 작심하고 ‘1등 문화’얘기를 꺼냈다. 2등, 3등을 기억하고 평가해주는 문화가 절실한 것 같다고 했다.
Q. 한국 사회의 ‘서열 문화’에 대해 느낀 바가 있나 보다.
A. 한국 사회에서는 영어 수학을 열심히 배워야 하고, 의대, 법대, 경제학과 가면 좋다고 하고, 이른바 ‘스카이 대학’ 중에 이왕이면 S대를 가라고 한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광고 카피도 있었다. 물론 한국의 역사를 보면 그런 문화가 에너지로 작용하던 때도 있었겠다 싶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도 다들 1등만 하라고 하면, 나머지는 뭐하나? 나머지는 기억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런데 다행히도 요즘 ‘1등 잣대’에서 벗어나는 한국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나는 그런 현상이 정말 흥미롭다. 내가 진짜 관심 있는 분야가 뭘까,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하는 한국 청년들이 늘고 있다. 숨겨져 있던 보석들이 반짝이는 느낌이라고 할까.
한국 사회는 굉장히 강점이 많다. 그런데 강점을 강점으로 인식하지 않고 약점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더라. 한국인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힘이 너무나 많은데 그걸 좀 제대로 인식하시면 좋겠다.
타일러는 안경을 고쳐 썼다. 그냥 예의상 얘기를 한 것 같아서 다시 물었다.
Q. 예를 들면?
A. 한국만큼, 스마트폰과 데이터 보급률이 높은 국가가 없다. 동시에 스마트폰 중독 가능성도 한국만큼 높은 나라가 없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약점이 될 수 있다. 분명 문제이긴 하다. 그런데 다른 국가들을 한 번 봐라. 한국만큼 높은 보급률을 달성하려고 엄청 애쓰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달성할 것이다. 그 국가들에 앞서서 스마트폰 중독을 겪고 있는 게 한국 아닌가? 그 약점에서 강점을 찾으면 한국적인 표준을 찾을 수 있다. 그 표준이 다른 나라를 위해 좋은 선례가 될 수 있고, 한국의 위상도 그만큼 뻗어나갈 것이다.
한국 사람들 상당수가 “아, 우리나라 사람들 정말 큰일이야! 스마트폰에 다 중독돼있어!”라고 개탄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오히려 그게 기회가 된다는 말이다! 미국에서도 앞으로 스마트폰 중독이 큰 문제가 될 텐데 그 해답을 제공해 주시면 굉장히 감사하겠다.
Q. 한국은 어떤 곳인가.
A. 나는 한국을 많이 사랑한다. 서울에 오래 살았으니까, ‘한국사람’이라기보다는 ‘서울사람’에 가깝다. 흔히 말하듯 한국이 ‘제2의 조국’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나의 ‘home’은 됐다. 한국어에는 home에 딱 들어맞는 단어는 없지만, 어쨌든 한국, 서울은 나의 home이 됐다.
미국 버몬트 주 출신인 타일러는 “고향 밤하늘이 맑아서 어렸을 때 은하수를 종종 봤는데, 그때마다 인간사의 모든 게 사소하게 느껴졌었다”고 했다. 나뭇잎이 낙엽이 되고 거름으로 돌아가는 섭리가 아름답게 여겨진다고도 했다. 그렇게 돌아가는 게 인생이라면 누군가에게 기억은 안 돼도 거름은 되고 싶다며.
취재. 글 : 장준성
촬영. 편집 : 최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