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는 국내 최장수 ′재연 프로그램′이다. 최근 700회를 돌파했고, 4월 7일 만 14년을 맞는다.
기록 속에는 얼굴이 있다. 고정 출연자들이다. 보면 ″아! 서프라이즈 그…″ 하는.
이들은 12분짜리 에피소드 5개로 구성된 ′서프라이즈′를 400회 이상 소화해왔다. 일부에선 그들을 ″재연 배우″라고 일컫는다. 구분하는 명칭이자, 차별하는 명칭이다.
배우들이 먼저 물었다. ′서프라이즈′ 연기는 연기가 아닌 것일까. 그곳 연기자들은 수준이 떨어지는 걸까? 재연 상황에만 어울리는 배우일까? 질문과 함께, 답도 이들이 내놓았다.
[등장인물] (왼쪽부터)
[김민진] ′서프라이즈′ 12년차. 38세. 공대에 다니다 군대에 갔다. 방공포 근무를 면해보고자 ′구타 근절 홍보 단막극′에 자원했고, 이후 연기자가 됐다. 짜증과 코믹이 섞인 소시민 연기가 주특기. 사기꾼, 독립운동가, 군인, 애처가, 교육자, 전문 도박꾼, 마초, 여장 남자 등 상반되는 이미지의 역할을, 분주하게 소화해왔다. 택시 면허증을 보유하고 있다.
[김하영] ′서프라이즈′ 13년차. 36세. 성우 지망생이었다. 2004년 MBC 성우 공채 전형을 진행하다 ′서프라이즈′ 출연 제의에 무조건 응했다. 지금껏 ′서프라이즈 마니아′를 자처해왔다. 표독한 사극 연기, 청순가련 비극 연기, 희극 연기, 공포 연기 등을 도맡아왔다. 처녀귀신 역할을 심심치 않게 맡는 바람에 머리를 짧게 자른 적이 별로 없다. 본인은 주저하지만 ‘서프라이즈의 김태희’라고 불린다.
[박재현] ′서프라이즈′ 14년차. 38세. 아역 배우로 시작해 줄곧 연기를 해왔다. 3인방 중에 ′서프라이즈′ 잔뼈가 가장 굵었다. 서글프게 우는 연기가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중 인격, 미치광이 연쇄 살인마, 일본군 장교, 독립운동가, 실연당한 남성, 제비, 불륜남, 훈남 스타 등등의 다양한 캐릭터를 선보였다. 커다란 눈과 굵고 진한 외모가 장점인데, 본인은 그게 약간 불만이다.
′서프라이즈′ 제작은 2주가 걸린다. 그러나 매주 방송되기 때문에 보통 1주일에 2회 분량을 준비한다. 아이템 선정, 대본 초고, 수정, 소품 준비와 장소 선정 과정을 거쳐 최종 대본을 내는 날은 목요일, 촬영은 금요일이다.
Q. 힘들겠다.
박재현 : 대본 받자마자 정신없이 대사를 외운다. 인터넷으로 실존 인물에 대한 공부를 해서 분위기를 잡는다. 다음날 아침 동료들과 같이 맞춰보고 리허설을 통해 완전히 숙지한다. 짧은 시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하는데, 습관이 되니까 하게 되더라.
김민진 : 자신 있게 얘기하지만, 그 누가 와도 ′서프라이즈′ 연기를 무시할 수 없다. 어떤 대선배께서 오시더라도 그럴 것이다. 아무나 못하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는 다르다. 연기 주문을 받을 때마다 준비 시간이 많이 필요한 배우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서프라이즈′ 연기자들은 그럴 시간이 없다. 바로 들어가야 한다. 연출자가 주문하면 ″네, 곧바로 하겠습니다.″라고 답하고 그대로 한다. 몸에 밴 거다. 연출자가 다시 수정을 요구하면 또 한다. 짧은 순간에 바로바로 헤쳐 나가야 한다. 그에 비하면, 드라마나 영화 연기 준비는 정말 일도 아니다.
김하영 : ″서프라이즈 출연하면서 무슨 연기가 되겠어? 연기 공부가 되겠어?″라고 묻는 분들이 더러 있다. 내 연기, 물론 지금도 부족하지만 많이 늘었다고 생각한다. 13년째 별별 역할을 다 하면서 연기력이 좋아지는 걸 느낀다. 연극영화과 은사가 처음에는 ″왜 그런데 출연하냐″고 물었지만 지금은 ″진짜 자랑스럽다″고 말해준다.
′서프라이즈′는 미스터리, 역사물, 코미디가 버무려진 논픽션 재연 프로그램이다. 아이템 선정과 진행에 PD 5명과 조연출 4명, 작가 7명이 투입된다. 현장 촬영 분량도 만만치 않다. 드라마가 보통 회당 30신~40신(scene : 드라마나 영화의 한 단락을 구성하는 단위)을 찍는다고 하면, ′서프라이즈′는 80신까지 찍는다. 한 번에 한 장소에서 몰아 찍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많이 찍지만, 실제 방송되는 분량은 에피소드당 12분이다.
Q. 12분 만에, 누군가의 인생을 보여줘야 한다.
김하영 : 짧은 시간에 모든 걸 다 걸고, 압축적인 연기를 해야 하니 배우의 감정이 과장될 수 있다. 연기자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몇몇 시청자 입장에서는 ″왜 저렇게 오버해?″라고 할 수도 있고. 12분 동안 한 스토리를 다 보여드려야 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찍는다고 치자. 현장에서 눈물 연기를 하나 주문한다고 하면 몇 번 씩 시킨다. 감정을 잡을 수 있는 시간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바로 그 순간 울어야 한다. 못 울면? 힐난이 튀어 나온다. ″야, 너 그것도 못 우냐?″
김민진 : 하루 만에 준비하느라 밤새고 나갈 때가 많다. 가끔 호흡 긴 연기를 하다보면, 제작진이 ′야, 드라마 찍냐′고도 한다. 조금만 호흡이 길어져도 채널이 돌아간다는 거다. 짧고 굵게, 모든 걸 보여줘야 하는 게 ′서프라이즈′의 장점이자 묘미이다.
박재현 : 그래서 재연배우라는 말을 따로 쓰는 지도 모르겠다. 짧은 분량 때문에, 아니면 재연 프로그램이라는 독특한 장르적 특성 때문에.
다만, 평생 열심히 연기를 해왔는데 장인(匠人) 대우까지는 아니더라도 연기자로 봐주고 배우로 대우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런데 재연 배우라는 구분으로 우리를 마치, 한 등급 낮게 보는 시선이 일부 존재하더라.
′서프라이즈′ 연출 김진호PD는 서프라이즈 3인방의 연기가 ″흉내 낼 수 없는 고통과 노력을 적립한 결과″라며 ″어디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지만, 재연배우 운운하며 차별하는 연기자가 있다면 도전부터 해보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박재현 : 어떤 분이 나를 알아보고 사인을 해달라고 할 때가 있다. 그런 뒤에 ″쟤, 서프라이즈 걔잖아. 재연배우 걔잖아.”라고 하신다. 기분이 상한다. 술자리면 찾아가서 말씀도 드린다. 그런 용어는 사실 없다고. 오늘처럼 인터뷰를 하고 기사가 나간 경우에도 제목이 곧잘 이렇게 나온다. ′서프라이즈 재연배우 4인방, 이들의 연기도 연기자 못지않아′. 연기자 못지않다니. 연기자인데! 그리고 모든 연기가, 인생의 재연이자 인물의 재연 아닌가?
김하영 : 드라마, 영화, 특히 사극인 경우 모두 재연(再演)이다. 나는 ′재연 배우′라는 말을 사실 신경쓰지 않는다. 그렇게 부르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부르셔도 된다. 나는 연기를 사랑하고, ′서프라이즈′와 맺은 깊은 정이 있고, 앞으로도 내 길로만 가면 되니까.
김민진 : 재연 배우라는 말이 맞다, 틀리다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뭐 어쩌겠는가. 다만 그 말을 계기로 재연 배우 운운하며 연기자의 등급을 매기는 듯한 시선이 마음 아픈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인터뷰 기사 보신 분들은 한번 쯤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다.
Q. 여러분이 재연해 낸 실제 인물들은 각각 400여명 정도 된다. 그 중에 기억나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누구일까.
김민진 : 일본 얘기인데.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쓰나미로 실종된 아내의 시신을 찾기 위해 잠수부 자격증을 딴 사람이 있었다.(2015년 5월 24일 방송) 촬영을 위해 MBC 양주 연수원(′서프라이즈′ 촬영 장소) 연못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 더러운 물에…
박재현 : 임진왜란 때 김충선 장군 이야기(2007년 12월 16일 방송)가 기억에 남는다. 조선군에 조총 기술을 전파해준 왜군 장수다. 왜군과 조선군 군복을 입고 같은 날 촬영했는데 인상적이었다.
김하영 : 조선의 여류시인 이옥봉(2005년 3월 27일 방송). 사랑을 위해 문학을 접었다가, 누명쓴 사람을 위해 다시 붓을 들었는데 집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자기가 쓴 시문을 두르고 바다에 뛰어내린다. 당시 날씨가 꽤 추웠다. 선녀바위 같은 데 올라가서 소복에 한지를 두르고 촬영했다. 바위 아래에서 촬영하는 스태프들이 정말 조그맣게 보였다. 조마조마하게 그 신을 찍고 내려와서 시신이 발견되는 장면까지 촬영하기 위해, 사실상 알몸으로 바다 속에 들어가야 했다.
매주 금요일 물불을 가리지 않는 촬영을 제외하고, 이들은 개인 일정을 꾸려간다. 생업과 꿈을 위해서. 지역 방송 출연도 하고, 연기 지도 강사도 하고, 과일 배달 아르바이트도 한다. 그러면서도 잊지 않는 공통의 목표가 있다. ′서프라이즈′ 1000회 돌파.
김하영 : 24살 때 ′서프라이즈′를 시작했다. 청춘을 바친 나의 ′몸′같은 프로그램이다. 다방면에서 열심히 내 끼를 보이고 싶지만, ′끝까지′ 서프라이즈와 함께 하고 싶다.
박재현 : 내 배우 인생의 모든 게 ′서프라이즈′에 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재연하며 인생을 배웠다. 재연 배우라는 선입견이 얼른 없어져서, 어린 친구들도 많이 도전할 수 있는 등용문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으면 좋겠다.
김민진 : 서프라이즈는 ′연기 학교′ 같은 곳이다. 그 곳에서 계속 연기하는 게 나의 꿈이다. 1000회 이상 무탈하게 방영되는 날, 배우들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할 텐데.
′서프라이즈′ 제작진은 ″소재 고갈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를 11년 전부터 들었다. 그러나 앞으로 최소 5년~6년 이상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 인간사에, 이 세상에, 놀라운 일이 끊이지 않기 때문″(김진호 PD)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