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데스크손령

위안부는 지어낸 이야기?…"일본인인 우리가 기억"

입력 | 2018-09-16 20:34   수정 | 2018-09-1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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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는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전쟁 당시 벌어진 성범죄의 참상을 목격한 일본인들이 많습니다.

피해자 추모비를 자발적으로 세우고 매년 한 차례 모여 그 날의 기억을 되새기는 일본인들을 손령 기자가 만났습니다.

◀ 리포트 ▶

일본 오키나와 본섬에서 남서쪽으로 약 290km 떨어진 미야코섬.

70여 년 전 태평양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열도의 최남단입니다.

이국의 외딴 섬에 울려 퍼지는 구슬픈 가락.

[이라부 미요/86세]
″자연스럽게 알게 돼서 어떻게 외우게 됐는지도 기억 안 나요.″

끔찍한 전쟁 성범죄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인 ′아리랑′은 섬 주민들에게도 이미 친숙합니다.

[나가자토 키미/84세]
″저는 맨날 위안소로 가서 ′언니, 나 왔어요′라고 하면서 아리랑 노래하면서 같이 놀았어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오키나와 인근 섬에만 위안소 130곳이 들어섰고, 끌려온 일본군 ′위안부′는 7백여 명으로 추산됩니다.

군인들과 함께 온 낯선 소녀들의 모습을 주민들은 생생하게 떠올립니다.

[요나하 히로토시/86세]
″여기가 위안소였는데 일요일이면 수십 미터정도 줄 서 있어요. 우리가 다 봤어요. 살아 있는 군인들도 있을 텐데 용기를 내서 증언을 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일본 당국은 군부대 작전지도 같은 증거 대부분을 없애는 데 바빴고 당시 이 지역에서 군홧발에 짓밟힌 할머니들마저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증거를 내놓으라′며 버티는 일본 정부를 대신해, 섬 주민들은 1년에 한 번씩 모여 그 시절의 참상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잊지 않겠다″며 자발적으로 ′아리랑비′를 세운 지도 어느덧 10년입니다.

′여성들에게′라는 내용의 추모의 비석을 만들기도 했는데, 위안부 피해를 입은 11개 국가의 언어와 베트남어로 번역해 두기도 했습니다.

[요나하 히로토시/86세]
″나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지만, 기록으로 남기면 이야기를 계속 전해주잖아요.″

[홍윤신/일본 와세다대학교 박사]
″피해자 여성들의 증언만으로는 굉장히 의심을 받는다거나 (하지만) 그 목격을 증언하는 분들의 증언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증거이고…″

하지만 당시 주민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생존한 고령자들도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

미야코섬 주민들은 기억의 대물림으로 전쟁과 착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우에사토 키요미/미야코섬 주민]
″이야기를 대대로 전해 주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우리의 책임이고요.″

양심과 인륜을 앞세운 일본인들의 국경을 넘은 반성과 추모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70년 한을 달래는 진혼곡으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일본 오키나와 미야코지마에서 MBC뉴스 손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