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06-12 11:26 수정 | 2020-06-12 11:27
# ″선생님이 강제로 입을 맞췄어요″
2018년 5월 31일,
중학생인 A군과 B군이 소속 중학교 상담 교사를 찾아갔습니다.
이들이 상담 교사에게 털어놓은 사실은 충격적이었습니다.
2년 전쯤, 그러니까 자신들이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다녔던 보습학원 여자 원장선생님에게 강제로 성추행 뿐만 아니라 강간까지 당했다는 겁니다.
이들은 성폭력 피해를 상담하는 해바라기센터를 찾았습니다.
사건 당시 11살이던 A군이 털어놓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선생님이 수업을 마친 자신을 차량 조수석에 태우고 집에 데려다 주는데 신호대기 중 갑자기 입을 맞췄다.
- 학원 교실에서 쉬고 있는데 선생님이 손목을 잡아끌고 옥상 입구로 데려가 입구에 있는 의자에 앉히고 양손으로 어깨를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 상태에서 입을 맞췄다.
- 학원 교실에 앉아 있는데 선생님이 마주보고 앉은 다음 자신의 중요 부위를 발로 건드렸다.
- 선생님이 집 앞으로 불러내 나갔더니 차에 태웠고 차에서 입을 맞췄다.
강간 당했던 상황도 털어놓았습니다.
- 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선생님이 ″내일 학원에 일찍 가 있을 테니깐 11시까지 보습학원으로 와″ 라며 아무도 없는 학원으로 불러내 소파에 앉힌 뒤 강제로 입을 맞추고 강간했다.
한달 뒤 이런 식의 강간이 또 한번 있었다고도 덧붙였습니다.
당시 13살이었던 B군 역시 선생님의 차 안에서 강제로 입맞춤을 당하는 등 4차례나 성추행을 당했다고 진술했습니다.
# 아이들의 진술만이 주요 증거…1심 재판부 ″징역 10년″
학원원장 D씨는 미성년자 강제추행 및 강간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이 사건의 증거는 아이들의 진술 뿐,
성추행과 강간을 당했다고 진술한 A군과 B군의 진술이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게 형량을 가를 핵심 요소였죠.
1심 재판부는 A군과 B군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D씨에게는 징역 10년의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진술 신빙성이 인정되는 이유로 진술이 구체적이고 상세하단 점을 들었죠.
특히 피해 아동의 연령을 감안할 때 전체적으로 피해자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진술할 수 없는 세부적인 상황 묘사, 사건·사물·가해자에 대한 특징적인 부분에 관한 묘사가 포함됐다고 판단했습니다.
A군의 진술이 어떠했다는 말일까요.
″강간 당한 직후 D씨는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라고 했고, ″나는 엄청 한심해 보이고 바보 같았다″
″D씨가 성적 접촉을 하기 전 ′내 남편이 네가 나에게 스킨십을 한 사실을 알게 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위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 내 남편이 너를 죽일 것이다′ 라고 말했다″
아동 장애인 진술 분석가들이 A군과 B군의 진술에 대해 ′사실 준거에 해당하는 내용을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고, 사건에 대한 풍부한 맥락과 세부 정보를 포함하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일관성과 통일성을 갖추고 있고 현실적이다′ 라고 평가한 점도 유죄 판단의 주요 근거가 됐습니다.
그런데 A군과 B군은 왜 2년이 지난 뒤에야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을까요.
′피고인의 남편이 알면 죽는다는 말에 무서워 이야기를 하지 못하다가 2년만에 용기를 냈다′
재판부는 이 말에도 수긍이 간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학원 강사 D씨측은 아이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며 몇 가지 사실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 범행 직후인 2016년 11월 A군 어머니의 부탁으로 A군이 D씨 집에 자연스럽게 머물렀는데 이는 ′성범죄 피해자의 일반적인 행동이나 상식′과 부합하지 않는다.
- D씨는 2016년 9월 7일 허벅지 지방흡입 수술을 받아 일상적인 활동 자체가 매우 불편한 상황이었는데, 그 다음날 교통사고까지 당해 13일까지 입원 치료를 받아 9일날 A군을 강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성범죄 피해자의 일반적 행동과 상식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고,
교통사고 피해가 경미해 D씨가 자유로운 이동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범행 당일 기록된 병원 간호기록도 치밀하게 작성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며 D씨측의 주장을 배척했습니다.
#″아이들 진술 믿기 어렵다″…뒤집혀진 항소심
D씨의 항고로 진행된 항소심, 판결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무죄′가 선고된겁니다.
역시 A군과 B군의 진술 신빙성 판단에서 갈렸습니다.
아이들이 진술이 거짓에 가깝다고 본 겁니다.
특히 판단에 앞서 다음과 같은 대법원 판례를 언급했습니다
″직접 증거로 사실상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경우, 오로지 피해자의 진술에 근거하여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 진술의 진실성과 정확성에 거의 의심을 품을 만한 여지가 없을 정도로 높은 증명력이 요구되고, 이러한 증명력을 갖추었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는 피해자가 한 진술 자체의 합리성, 일관성, 객관적 상당성은 물론이고 피해자의 성품 등 인격적 요소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대법원 2012.5.10 선고 2011도 16413 판결 등)
잘못된 판결로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직접 증거가 진술 밖에 없다면 그 증거력 자체가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높은 증명력을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진술은 그렇지 않다고 판단한 거죠.
항소심 재판부는 진술자체의 구체성보다는 객관적 사실과 진술이 부합하는 지를 좀 더 집중적으로 살펴봤습니다.
2016년 9월 9일.
A군이 강간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날입니다.
A군의 진술에 따르면 첫 번째 성관계는 9월 중에 있었는데 자신이 축구 테스트를 보러 간 날 직후이며, 그냥 학교 가기가 싫어서 아프다는 핑계를 대로 결석한 날이라는 겁니다.
A군의 2016년 학교 출결 현황을 살펴봤습니다.
A군이 9월 중에 결석한 날은 다리 골절을 이유로 한 9일이 유일하고 나머지 결석한 날은 12월에 세차례 뿐입니다.
따라서 A군 주장에 따른 성관계 날짜는 9일이 아닐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그런데 남겨진 병원기록에 따르면 9일에 A군은 축구를 하다 좌측 염좌와 인대 파열 부상을 입었고 부목 고정과 약 처방을 받았습니다.
학교 가기 싫어 결석한 날에 성관계를 했다는 A군의 진술과 정면 배치되는 사실이죠.
결석 사유를 잘못 기억했다 쳐도 A군의 말이 사실이려면, 다리 인대 등이 파열된 상태에서 깁스를 한 와중에 D씨와 성관계를 했어야 합니다.
재판부는 ″피해자 A군이 해바라기센터에서 첫 번째 성관계를 할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그 전날 자신이 다리를 다친 상태였다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경험칙상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A군이 성관계 당시 자신이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고까지 진술하였다는 점을 비추어 보면 더욱 그러하다″ 고 밝혔습니다.
게다가 A군이 법정에서 이렇게 객관적 사실과 어긋나는 자신의 진술을 해명하지 않았고, 재판부의 질문에도 대부분 기억나지 않는다는 답변으로 일관한 점도 꼬집었습니다.
1심에선 배척됐던 D씨의 상황도 항소심에선 인정됐습니다.
′허벅지에 지방흡입 수술을 받은 뒤 다음날 A군과의 성관계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불편할 수 있다′는 성형외과 병원 의사의 진술이 판단 근거로 제시됐고,
′교통사고 뒤 D씨가 병원에 자신의 딸과 입원을 했는데 딸을 두고 학원으로 가 A군과 성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겁니다.
A군보다 훨씬 상세하고 풍부한 진술을 한 B군, 재판에서도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억해내며 일관되게 진술된 점이 인정됐습니다.
하지만 역시 미심쩍은 객관적 상황들이 존재했습니다.
B군에게서 피해를 당했다고 들은 친구의 진술에 따르면, B군이 웃고 장난하는 분위기에서 피해 사실을 이야기 했다는 겁니다.
또 B군은 D씨가 일주일에 2,3번씩 하원차량 에서 자신에게 키스를 했다고 진술했는데, 실제 하원 차량에서 D씨가 아이들을 내려주는 순서에 따르면 B군과 D씨 둘만 차 안에 남아있을 기회는 매우 드물었다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D씨가 B군을 빈번하게 추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항소심 재판부는 아이들의 진술이 공소사실을 유지할 만큼 진실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D씨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했습니다.
#대법원 ″무죄 맞다″ …벗겨진 누명
검사의 상고로 사건은 대법원까지 오게 됐습니다.
대법원 3부는 어제(11일) 원심의 판단이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반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두 장도 안되는 짧은 판결문에 가장 비중있게 언급된 건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증명력을 가진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었습니다.
이번 판결을 통해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면 억울한 옥살이를 떠나 평생 ′미성년자 강간범′이란 누명을 쓴 채 세간의 지탄을 받았을 D씨,
″백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단 한 명의 죄 없는 이를 벌해서는 안 된다″는 법의 기본원칙이 새삼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