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데스크홍의표

"'433·332·333' 외워서 진술…검찰의 강아지였다"

입력 | 2020-05-14 20:12   수정 | 2020-05-1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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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

2015년, 한명숙 전 총리가 불법 정치 자금 유죄 판결로 구속 됐습니다.

한 전 총리의 자금 수수 의혹은 한만호 한신 건영 대표가 9억 원을 건넸다고 폭로하면서 불거 졌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 대표는 재판 과정에서 ″거짓말이었다″고 진술을 번복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지금은 고인이 된 한만호 대표가 옥중에서 작성한 비망록을 탐사전문 매체 뉴스타파가 입수했고 MBC가 이를 공동 취재했습니다.

먼저, 비망록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홍의표 기자가 보도합니다.

◀ 리포트 ▶

′수인번호 3382 한만호′.

다른 사건으로 구속 수감돼 있던 한만호 대표는 2010년 3월30일 경남 통영교도소에서 갑자기 서울구치소로 이감됩니다.

그리고 4월 1일,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 불려갑니다.

서울시장 선거를 두 달 정도 앞둔 시기.

영문도 모른 채 죄수복을 입고 조사실로 호출된 한 대표는 어느 정치인의 이름을 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야당 후보로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했던 한명숙 전 총리였습니다.

[한만호 비망록 21쪽]
수사관님과 검사님이 ′절대 불이익이 되지 않게 하겠다. 한 총리에 대해서 성실하게 사실대로 답변해달라. 선택해라, 협조해서 도움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힘들게 해서 어려워지시든지…′

″하늘이 무너지는 공포감″ 한 대표가 쓴 그날의 기억입니다.

그는 결국 출소 뒤 사업 재기에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에 검찰에 협조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합니다.

[한만호 비망록 21쪽]
돌아와서 밤을 꼬박 새웠다. 추가 기소되면 부모님 아이들이 버틴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제 자신에게 합리화했다.

9억을 3번에 걸쳐 3억씩, 한 전 총리에게 현금과 수표, 달러를 섞어 전달했다는 검찰의 기소 내용.

한 대표는 검찰이 조서를 주고 외우게 한 뒤 시험까지 치며 만들어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비망록 77쪽]
방에서 운동장에서 시험준비하느라 혼자 중얼중얼대서 다른 수감자들이 이상한 사람으로 쳐다봤다. ′구치소에서 공부하라′ 하며 조서에 답변 내용 매주 불러서 ‘시험본다’ 테스트 했다.

잘 외우지 못하자, 돈을 전달 때 한 전 총리와 통화한 횟수를 임의로 고치기도 했다고 썼습니다.

[비망록 70쪽]
매번 3번씩 433으로 스토리 만들었다가 나중에 332로 했다. ′소동이 되니 그냥 333으로 하자′ 합의하고 진술과 연습했다. 종종 자금제공 순서가 바뀌고 해서 검사님이나 수사관님들이 당황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검찰의 입맛대로 잘하면 특식이 제공됐는데, 한 대표는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고 털어놨습니다.

[비망록 139쪽, 1086쪽]
그래도 20년 넘게 CEO한 사람을 마치 저능아 취급했다. 그 모멸감은 죽어서도 잊지 않을 것이다. 한만호는 없어지고 오로지 검찰의 안내대로 따르는 강아지가 되었고…

한만호 대표는 총 70여 차례 검찰 조사를 받았는데 진술 조서를 쓴 날은 단 5번뿐이었습니다.

[김정범 변호사/한만호 대표 당시 변호인]
″′돈을 3억씩 3번 줬다′는 간단한 진술을 듣기 위해서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사람을 검찰에 60~70번 부른다는 건 납득할 수 없었어요. 나머지는 불러서 뭐했냐는 거예요.″

그런데 2010년 12월 한 전 총리의 두번째 재판 날, 한만호 대표는 자신의 진술을 뒤집기로 결심합니다.

검찰 조사 때 인정했던 ′불법 정치자금 공여′는 없었다고 판사 앞에서 진술한 겁니다.

[비망록 135쪽]
제가 부관참시를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진실을 밝혀야겠다 결심했고, 손꼽아 기다려서 (2010년) 12월 20일 행동한 것입니다.

사건이 지나치게 조작되고, 검찰이 자신의 진술을 언론에 흘려 서울시장 선거에 개입하려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꼈다는 이유였습니다.

[비망록 1111·142쪽]
수사관에게 ′노무현 대통령도 저래서 자살한 것으로 알고있는데 한 총리님도 이러다 그렇게 되시는 것 아닐까요? 정말 걱정됩니다′ (고 물었다.) 얼마나 엄청난 범죄를 날조한 것인지에 살아있음이 더 고통스러웠다.

MBC뉴스 홍의표입니다.

(영상취재: 김신영 남현택 / 영상편집: 배윤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