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4-07-28 09:08 수정 | 2024-07-28 14:02
지난주 수요일, 서울중앙지법에서 민사소송 재심을 열지 따지는 첫 재판이 열렸습니다. 가수를 꿈꾸며 한국에 들어왔다가 클럽 접대부가 되었던 필리핀 여성 노동자 3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었습니다. 2018년 이미 소송을 냈다가 대법원까지 내리 패소했는데도, 다시 재판을 받게 해달라며 7년째 법정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인신매매 피해자들입니다.
<div class=″ab_sub_heading″ style=″position:relative;margin-top:17px;padding-top:15px;padding-bottom:14px;border-top:1px solid #444446;border-bottom:1px solid #ebebeb;color:#3e3e40;font-size:20px;line-height:1.5;″><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 </div><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 </div><div class=″ab_sub_headingline″ style=″font-weight:bold;″>가수 꿈꿨지만, 접대부로 전락</div><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div></div>
사건은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들은 2014년 필리핀에서 각각 예술흥행 비자를 받아 한국에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 노래할 순 없었습니다. 이들이 보내진 곳은 경기도의 한 미군 부대 앞 클럽이었습니다.
<strong style=″font-weight:bold; font-family:initial;″>″업주가 2층으로 가게 하면서 휴지를 줬어요. 왜 주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손님이랑 올라가라고‥ 그날 밤은 최악이었어요.″</strong>
취재진과 인터뷰했던 한 여성의 증언입니다. 여성은 돈을 벌려면 남성들에게 술을 팔거나 성매매를 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매달 150만 원을 받기로 계약했지만 처음 석 달 동안은 월급 한 푼 받지 못했고 이후에도 실제 받은 돈은 80만 원 남짓이었다고 했습니다. ″손님이 널 만지면, 술을 더 많이 팔 수 있잖아.″ 업주가 이렇게 설득하며 성매매로 내몰았다고 여성은 증언했습니다.
여성들은 낯선 땅에서 도움을 청할 곳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여권은 업주가 보관했습니다. 여성들은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다며 업주가 수시로 협박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클럽 여성들은 업주로부터 여러 차례 성추행도 당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벗어날 기회가 왔습니다. 이듬해 3월 여성들은 성매매 단속에 나선 경찰에 체포됐다가 풀려난 뒤 클럽에서 나와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이후 다시 경찰에 체포됐는데, 이때 처음으로 성 착취 피해를 털어놨습니다. 업주의 강요로 성매매할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러나 업주는 이들이 성매매한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다며 자발적 성매매라고 반박했습니다. 임금도 제대로 지급했고 협박한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검찰은 ″CCTV를 봤을 때, 여성들이 자유롭게 외출했고, 휴대전화가 있었는데도 외부에 어떤 항의도 하지 않았다″, ″한 피해자는 자발적으로 성매매했다고 진술했다″며 성매매 강요는 없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업주는 인신매매 혐의로 기소되지 않았습니다. 상습 성추행과 성매매 알선 혐의로만 기소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검찰은 여성들에 대해서는 성매매 혐의가 인정된다며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습니다. 인신매매 피해자가 아니라 성매매 범죄자로 본 겁니다.
그러나 반전은 UN에서 일어났습니다. 지난해 10월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여성들의 진정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인신매매 피해자라며 국가로부터 2차 피해를 당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위원회는 ″대한민국이 필리핀 여성들을 인신매매 피해자로 확인하는 데 실패해 결과적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이뤄졌다″며 사과와 원상회복, 금전적 배상을 포함하는 ′완전한 배상′을 권고했습니다.
위원회가 꼽은 실패 원인은 경찰과 법원의 ′고정관념′이었습니다. 위원회는 ″인신매매 피해자의 행동에 대한 경찰과 법원의 고정관념이 있었다″며 ″성매매 가담 여부에만 초점을 맞춰 조사했다는 여성들의 주장에 주목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성매매에 자발적으로 가담했다는 최초 진술과 이동이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인 점,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인신매매 정황이 조사되지도 기소되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위원회는 또 ″진정인들의 여권이 압수됐고 언어적·신체적·성적 학대를 당했고, 경찰 신고가 소용없을 것이라는 위협을 당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고정관념은 인신매매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한국도 가입한 ′UN 인신매매 방지 의정서′에 따르면, 인신매매는 단순히 사람을 강제로 납치하거나 감금해 사고파는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모집해 운송하며 사람을 속이거나 경제적으로 취약한 지위를 이용해 성 착취·노동착취를 일삼는다면 모두 인신매매에 해당합니다. 설령 자발적인 성매매였다고 하더라도, 고용주나 브로커가 피해자들의 취약한 지위를 이용했다면 인신매매일 수 있는 겁니다. 여권 압수는 대표적인 인신매매 식별 지표입니다. 한국에선 2021년에야 이 기준을 채택해 2023년부터 인신매매 방지법이 새롭게 시행됐지만, 여전히 형사처벌은 과거 기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그러나 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전혀 배상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과도 없었습니다.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김종철 공익법센터 어필 변호사는 ″정부로부터 연락 한 번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김 변호사는 권고 두 달 뒤, 국가손해배상 소송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첫 재판이 지난주 수요일 열렸습니다.
그러나 재심 재판이 정식으로 시작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합니다.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재심 판결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답변한 정부는, 정작 재판에서는 ″재심 사유가 되지 않는다″며 소송을 각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김 변호사는 ″정부의 배상 의지가 없는 것과 별개로, 기소유예를 받았다는 사실이 재판의 결정적 장애물″이라고 했습니다. 앞서 패소한 국가배상소송 판결의 기초가 된 행정처분, 즉 검찰의 기소유예 처분이 취소돼야 재심을 시작할 수 있고, 그래야 피해자를 범죄자로 본 국가의 책임을 따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여성들은 자신을 범죄자 취급한 수사기관에 다시 호소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2015년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던 의정부지검에 ″기소유예 처분 취소를 간곡히 부탁드린다″며 의견서를 제출했습니다. 꼬인 실타래를 처음부터 풀어 달라는 겁니다. 물론 기소유예 처분 취소 역시,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권고한 ′완전한 배상′에 포함되기도 합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여전히 인신매매는 벌어지고 있습니다. 법무부가 운영하는 계절근로자 제도를 이용해 입국한 농촌 이주 노동자들. 2017년 1,547명에서 지난해 4만 명으로 급증한 계절근로자 제도에서도 인신매매 피해를 호소하는 노동자들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입국 과정에서부터 브로커들이 개입해 노동자들의 여권과 통장을 보관하고, 취약한 지위를 이용해 과도한 수수료를 떼가고 있습니다.
문제 해결은 결국 과거를 반성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UN의 권고에도 ″재심 재판 결과에 따르겠다″며 재판에선 각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부에 무슨 기대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지난주 수요일 재심 재판부는 여성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줬습니다.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풀어줄지 기다려보겠다며 오는 9월 재판을 한 차례 더 열기로 한 겁니다. 2014년 입국해 소송만 7년째 벌이고 있는 피해자들은 배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